이아석 칼럼위원

▲ 이아석 남해안시대포럼 의장
사람의 수명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굳이 통계를 들이대지 않아도 옛적에 사십만 지나면 늙은이 행세를 자처하면서 노후를 살피던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인생의 60년을 한 갑자로 셈한 것은 삶의 주기율을 상징하는 것이고, 환갑잔치를 인생의 마감행사처럼 여기던 시절에서 보면 이러다가 머잖아 일생에 회갑을 두 번쯤 하게 되는 현상이 닥칠지 모른다.

전 세계 건강지수와 수명을 연구하던 어느 기관은 불과 반세기도 안가서 한국인이 세계 최장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런 예고의 이유로 어떤 일이건 집착하고 성사시키는 기질을 들었는데 현재 최장수국인 일본을 재치는 힘이 곧 철저한 건강관리의 사회적 공감성에도 기인한다고 한다. 흔히 입에 침도 안바르고 내뱉는 거짓말 가운데 노인이 일찍 죽고싶다는 게 있다.

처녀가 시집 안간다는 말이 현실화 되고 장사꾼이 손해보고 판다는 말도 사실일 수 있으나 노인이 일찍 죽고싶다는 건 가장 믿기 어려운 거짓말이라고들 한다.

물론 그런 말이 믿기게 될 만한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삶의 가치로 따진다면 아무런 쓸모없는 노약자의 세월에도 집착이 만만찮다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보아서는 장수가 천복이라고 여기던 문화가 여전한데 고령화 시대의 사회현상이 빚어내는 여러 가지 폐단이나 행복지수가 과연 어떨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그런 가운데 '내일 당장 죽어도 호상(好喪)'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정년이라고 여기는 직업제도의 환경과 관계없이 온전하게 사회적 참여활동이 힘들어지고 정신적 육체적 활기가 사라진 후 그저 나날이 살아만 있어도 그게 수명으로 셈하는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마디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가치가 사라지고 자칫 연명을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구차하게 나이를 먹게 되는 행위가 싫은 사람들이다. 의학적으로는 병을 얻어 치료가 불가능해지고 소생의 가망이 없이 의료 기구에 의해 의존되는 상태를 '식물인간'으로 취급하지만 그것과는 또다른 해석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런 신념이 강하고 지나쳐서 자살을 택하거나 심지어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 집단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한다.

사람 사는 일이 천태만상이겠지만 가치 없는 삶을 스스로 폄하하는 궁극적인 자존심과 선택은 여전히 숙제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여전히 일상적인 가치와 메카니즘에 매달려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고 좀 더 오래 살 것인가에 경쟁하게 될 전망이다.

일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주 앉게 되는 TV 브라운관의 채널 선호도가 웰빙이나 의료관련 프로그램으로  모아지고 거기서 얻은 엑기스들을 저장할 주방의 냉장시설이 늘어나는 추세가 이를 대변한다.

또 이런 현상은 지금 먹고 살만한, 사회나 국가에서 늘어나고 그 심리적 저변에는 소심하거나 이기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그 정도가 높다고 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런 현상과 사실들이 복합적으로 추구하는 외형적 행태는 '행복하게 오래 살자'는 욕망의 발로이다.

여기에 관한 논리나 인생의 가치적 조명이나 당위성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와 철학, 신화와 사건들의 교훈들에서 숱하게 거론되고 배워 온 내용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갇힌 인생의 내용물이 고통과 갈등, 불행과 좌절로 응어리져 있는 실체에서도 어느새 동화되고 거기서 한 발짝도 달아나려 하지 않는 관성을 지니고 있다.

태어나면 시작과 끝까지 그런 힘으로 가야하는 행로가 인생의 숙명이라면 100세 시대가 주는 환경이 어떤 것이어야 하고, 그 환경의 나이와 사회적 모순이 빚어내는 괴리를 지금부터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80, 90을 넘은 노년세대가 사회적 짐을 가중시키거나 개인적 연명의 선상에서 허우적이는 삶이라면 장수라는 표현은 불행의 연장이 될 것이고 사회정체의 구실이 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사회는 이런 근본적인 인간사회의 틀에 대한 자각과 인식을 고취할 어떤 교육도, 의식제고나 제도적 보완도 모자라는 실정이다. 입으로는 행복정치를 내세우면서도 그 행복의 구체성이 없는 허구가 남발되고 있다.

만약 지금처럼 장수의 현상을 개인적 능력에 의한 보편적 현상이나, 그런 현상으로 인한 경쟁과 욕망의 구도로 방치한다면 100세 시대가 주는 새로운 지구촌의 고립과 고독한 노령화가 이어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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