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거제도는 통영군에서 원래 행정지역인 거제군으로 복군을 희망했다. 1949년 4월2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거제도민은 복군을 요망한다'는 제목으로 1914년 당시의 총독부로부터 국내의 행정기구를 축소·간소화시킨다는 명목으로 거제도를 육지와 가장 가까운 통영군에 합병했다. 현재 거제사람들은 한결 같이 거제도 복군을 갈망하고 있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이 기사는 당시 경상남도 초대 도의원에 이어 제2대 경남도의회 의장직을 맡게 된 진석중 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채오(李采五) 의원에 의해 제2대 국회 제
한국전쟁으로 조용한 바닷가 섬 동네였던 거제지역은 1951년 2월부터 포로와 피난민·군인·거제 지역민들로 하루아침에 사람이 들끓는 섬이 됐다.거제시지에 따르면 당시 조사된 거제인구는 지역민 10만5000여명·포로 17만3000여명·군인 9000여명(1951년 말 국군 제33경비대대·미군 1개 대대 및 187공수부대 등 9500여명)·피난민 15만여명 등 40만명이 넘었고, 조사되지 않은 피난민까지 더하면 50만명에 가까웠다.한국전쟁 당시 설치된 거제도포로수용소엔 1951년 3월5일부터 유엔의 구호기관인 'CAC 거제도팀'이 신설됐다
1950년 12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미군과 한국군은 함경남도 흥남에서 철수작전을 펼친다. 철수작전은 1950년 12월15일 시작돼 1950년 12월23일까지 이어졌다. 당시 흥남항에는 중공군을 피해 10만명에 가까운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마지막 배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정원이 60명에 불과한 화물 운반선이었다. 하지만 한국군과 현봉학 박사의 계속된 설득으로 배에 실었던 항공유 300톤 등 전쟁물자를 모두 버리고, 1만4000여명의 피난민들을 배에 태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23일 토요일 오후 2시
거제도포로수용소는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수용소였다.한국전쟁 최초의 공식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8일 국군이 잡은 북한군 포로 5명을 대전형무소 내 수용한 대전포로수용소다.이후 한국군의 잇따른 패배로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그해 7월14일에는 대구 효성초등학교에 '제100포로수용소'가 세워졌다가 부산 등지로 옮겼다. 나중에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사령관에게 이양되면서 미군의 포로수용소와 통합된다.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과 중공
거제지역의 민간인 희생사건은 부역혐의사건·국민보도연맹사건·군경토벌 민간인 희생 사건 등으로 한국전쟁 발발 전후 발생했다. 지난 2006년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9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거제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는 최소 475명에서 최대 800여명이다. 대다수가 좌익활동 경력이 전무하고 좌익사상과는 무관한 20~40대 농·어민이 대부분이었다.이승만 정부는 1949년 3월부터 약 3개월 동안 38명의 민간인을 좌익에 협조한 협의로 구조라리 인근 야산 등에서 학살했다. 1949년 4월부터 1950년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대규모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약 한 달 뒤인 4월3일과 4월6일 거제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아주장터와 옥포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거제의 만세운동은 1919년 4월3일 이운면 아주장터에서 시작됐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독립만세시위를 모의한 윤택근(尹澤根)은 이주근(李柱勤)·이인수(李麟洙)·이공수(李恭洙) 등과 거사를 결의했다.4월1일 이운면 아양리 서당에 모인 윤택근 등은 종이 10여매에 '대한제국독립만세(大韓帝國獨立萬歲)'라고 크게 쓴 격문
우리나라 수협의 효시는 거제수협이다. 거제수협은 1908년 7월10일 농공상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사등면 가조도에서 시작된 '거제한산가조어기(巨濟閑山加助漁基)' 조합과 '거제한산모곽전(巨濟閑山毛藿田)' 조합으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다소 어려운 용어인 '어기'란 어장(漁場)의 일종이며, '모곽전'은 우뭇가사리와 미역 채취장을 일컫는다. 이 두 조합은 수산관계법령에 따라 설립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수산인들이 조직한 협동단체이자 최초로 조합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1876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상요구에 응하면서 어업활동에 제한을 받기
거제초등학교는 대한제국 말 문을 연 거제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으로, 거제초등학교의 역사는 지역 근대교육의 역사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거제초등학교는 시대에 따라 사립 거제보통학교(1907년)→공립 거제보통학교(1911년)→거제성내심상소학교(1938년)→거제성내공립초등학교(1941년)→거제공립초등학교(1945년)→거제초등학교(1949년) 순으로 변했다.거제초등학교는 1907년 2월10일 거제군수 고의준이 주창하고 김경식·유공환·염상수 등이 협력해 모은 기금 3800환으로 사립 거제보통학교로 설립된다. 당시 교실은 가정집의 온돌방을
1876년 조일수호조약을 맺으면서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영향권 아래 근대화를 맞는 과정에서 일본인은 우리나라 해역에 어업을 하기 시작한다. 특히 1889년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으로 일본인의 어업은 전라·경상·강원·함경 해안에서의 합법적인 어업이 가능하게 됐다. 이 시기 거제에도 일본인 어업인이 진출해 장승포, 일운면, 남부면 일대의 어장을 침탈당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승포지역은 일본인 어업이 성행하던 곳으로 일본인 거주지역인 입좌촌(入佐村)이 만들어졌고 1877년 11월에는 우편소까지 세워졌다. 참고로 우리나라
옥산금성은 1872년 거제부사로 부임한 송희승(宋熙昇)이 1873년 쌓은 성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 2016년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19세기(조선시대)가 아닌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축성한 성곽임이 밝혀졌다. 송희승은 기존에 있던 수정봉산성을 증축해 옥산성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옥산성은 1873년 3월6일 처음 축성을 결정한 후 3월15일 축성 준비를 거쳐 5월에 공사가 시작돼 1873년 10월15일에 완공했다. 옥산성은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거제 전역에서 2만냥의 축성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거제는 임진왜란 전후 고현성을 읍치로 삼았던 시절 남명 조식의 학통을 계승한 지역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 학파의 계승과 세력이 약해졌고 2차 예송논쟁에서 밀려난 성리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1679년 3월 거제도로 유배 오면서 거제는 송시열 및 노론계 학통이 널리 숭상된다. 송시열은 73세 때인 1679년 3월25일부터 1680년 5월15일까지 거제에서 1년 남짓 귀양살이를 했다. 이때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거제를 비롯한 유배지에서도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집필해 거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소굴이 된 거제도는 전후 복구가 힘들 정도로 황폐해 있었다. 고현성 내 지어진 관청 건물도 불에 타 무너져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물과 토질이 나빠 병으로 죽는 관리가 많았다. 여기다 거제로 유배 온 죄인들의 관리가 힘들어 광해군 9년(1617)에는 거제로 유배 온 죄인 중에서 168명이나 도망갔다는 기록도 있다. 현종 5년(1664) 경상감사 이상진(李尙眞)이 거제의 수군진을 정비하는 문제와 거제현(巨濟縣)의 읍치를 명진촌(明珍村)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관아와 향교를 지금의 거제면으로 옮겼다
임진왜란 이후 거제 수군진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방어의 중심이 거제도 북동쪽(부산 방향)에서 남서쪽(통제영)으로 이동한다는 것과 이후 신설되거나 이진한 수군진에 진성을 쌓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숙종 4년(1678) 통제영성을 쌓는 시기에도 거제지역에선 통영성 축성을 위해 성돌을 이동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수군진성의 축성 사례나 기록은 없고 거제의 성벽을 허물어 통제영성의 석재로 사용했다는 기록만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군제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무기체계와 전략전술의 변화 및 수군의 전술과 훈련체계의 필요성을 깨닫고 수군의
1597년 7월16일 새벽 거제 칠천량해협에서 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일본군에게 크게 패배한다. 칠천량해전에서 통제사 원균을 포함해 해전 경험이 풍부한 수많은 지휘관과 조선 수군이 전사하고 함대와 병력 대부분을 잃는다.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조선 수군이 패배한 전투이기도 한 칠천량해전은 군선 160여척과 1만여명의 병사가 전사한 조선 수군의 가슴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패전이라는 점에서 당시 지휘관이었던 원균이 모든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칠천량해전의 원인은 당시 조선 조정이 무리하게 부산포 공격을 원균에게
장문포해전은 1594년 11월12일~12월29일(음력 10월1일~11월18일)까지 장문포(장목면)를 중심으로 수륙 합동작전으로 진행된 해전이다. 제1차 장문포해전·영등포(永登浦)해전, 제2차 장문포해전으로 나눈다.장문포해전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였던 옥포해전이나 일본군의 전의를 상실하게 했던 견내량해전(한산대첩)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전투다. 하지만 조선군과 일본군 최고의 명장이 한자리에 모인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이자 조선의 수륙군 양동작전이라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전투이기도 하다. 장문포해전에 참가한 장수의 이름을 나열해 보면 조선
일본군은 견내량해전 이후 남해안 일대를 점거하고 근거지를 확보와 상호 연락을 위해 성을 쌓았다. 일본군은 정유재란 시기까지 30여개 이상의 왜성(倭城)을 남해안 일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연결성(連結城)으로 일본군의 군수물자의 보급로 확보를 목적으로 쌓은 성곽이다. 일명 '쓰타이노시로(つたいの城)'로 불리며 군대가 거의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쌓았다. 주로 조선의 읍성을 고쳐서 사용하거나 적당한 읍성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이 간단하게 축성했다. 둘째는 통치성(統治城)으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대첩은 원래 견내량 해전으로 불렸다. 1592년 8월13일(음력 7월7일) 조선 수군 연합 함대가 당포에 머무르고 있을 때, 거제 목동 김천손이 "일본 군선 70여 척이 낮 2시쯤 영등포 앞바다를 지나 고성과 거제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고 알렸다. 다음날 조선 수군은 일본 함대 쪽으로 출발해 왜군의 척후선을 만난 후 이들을 추격해 본대와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견내량 해역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같이 대형 선박이 항해하기 어려운 긴
이순신의 1차 출정은 3박4일 동안 거제도를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서 3곳의 전투에서 승리한 해전이었다. 거제지역 향토사에는 옥포해전에서 30척 중 26척의 전선을 잃은 왜군은 옥포진성에서 전열을 재정비해 옥포해전 이틀 후인 5월 9일 거제현의 중심인 고현성을 침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바로 거제의 조라, 지세, 율포 영등포 등은 이미 왜군이 점령했고 거제현령 김준민이 홀로 고현성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옥포해전이 벌어진 시기에 김준민은 제승방략 전술에 따라 초유사 김성일(金
1592년 4월 왜의 선봉대는 부산포를 시작으로 조선의 방어선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북진을 계속했다. 전쟁 시작 2개월여만에 선조와 세자(광해군)는 한성을 버리고 평양까지 쫓겨 간다. 당시 판옥선 4척(협선 2척)으로 겨우 거제 바다를 지키고 있던 경상우수사 원균은 율포 권관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 지 20일 뒤인 5월4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판옥선(板屋船) 24척과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거제를 지원하기 위해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를 떠난다. 여수를
중종 5년(1510) 4월4일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과 대마도 왜구가 전선 1000척을 이끌고 거제 영등포(永登浦)를 에워싸 공격하면서 삼포왜란이 시작됐다.당시 영등포 군사들과 민중들은 수적인 열세를 딛고 방어하자 왜구들은 군사의 반을 근처 주물도(主勿島·이수도)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반은 웅천 제포와 동래 등으로 보내 약탈했다. 4월5일 왜구 무리가 큰 배 5척을 타고 하청리(河淸里)에 정박하자 거제 현령(巨濟縣令) 오세한(吳世翰)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구을 공격했고 왜구들은 곧바로 배 4척에 나눠 타고 바다로 도망갔다. 하지만 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