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2중 철조망으로 격리된 거제도포로수용소. @거제신문DB
1950년 2중 철조망으로 격리된 거제도포로수용소. @거제신문DB

거제도포로수용소는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수용소였다.

한국전쟁 최초의 공식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8일 국군이 잡은 북한군 포로 5명을 대전형무소 내 수용한 대전포로수용소다.

이후 한국군의 잇따른 패배로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그해 7월14일에는 대구 효성초등학교에 '제100포로수용소'가 세워졌다가 부산 등지로 옮겼다. 

나중에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사령관에게 이양되면서 미군의 포로수용소와 통합된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과 중공군의 참여로 포로가 늘어나면서 유엔군은 포로들의 대규모 수용과 관리를 위해 1951년 2월 본격적으로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계획수립 과정에서 처음 6만명 규모로 계획됐다가, 나중에는 22만명의 포로를 수용하는 규모로 확대됐다. 

거제지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지역은 섬의 중앙에 해당하는 현재 고현동 일대를 중심으로 용산·장평·문동·양정·수월·제산리와 연초면 임전·송정, 남부면 저구리 일대였다.

1953년 6월18일 휴전이 가까워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시킨다. 

이 사건으로 반공포로 3만4900명 중 2만7389명이 탈출했다. 이후 7월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거제도포로수용소는 폐쇄됐고, 포로수용소 설치 이 후 60여년이 지난 현재는 당시의 건물 일부가 남아서 보존되고 있다. 

★ 한국사 산책 = 한국전쟁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군사적 편의에 따라 38도 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이 분할·점령하게 된다.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은 1950년 6월25일 38도선 전역에서 남침을 강행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다.
 한국군은 북한의 앞선 병력과 무기에 밀려 한 달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는 상황에서 미국 주도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려 유엔군이 파병됐다. 유엔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한다.
 하지만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렀고,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가 계속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3년 전쟁으로 인명 피해가 약 450만명에 달했으며, 남한의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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