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배 칼럼위원

어느 젊은 사람이 홍콩(Hong Kong·香港)에 다녀와서 하는 말이 “홍콩에서 영어를 했더니 통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홍콩사람들이 영어가 통하지 않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 젊은 사람은 영어를 꽤 잘하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몇년 뒤 필자도 홍콩 방면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한 미모의 아가씨가 신문을 읽고 있기에 어깨너머로 봤더니 영자(英字)신문을 읽고 있었다. 어디 사는 사람이냐고 말을 걸었더니 홍콩사람인데 부산 친구네 집에 놀러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아가씨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어서 홍콩까지 가는 동안 홍콩에 관한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홍콩사람이 영어가 통하지 않다니 속으로 생각했으나 뒤에야 그 아가씨가 호주(濠洲)에 영어연수를 가서 사귄 부산 친구 아가씨네 집에 놀러와서 부산 인근을 관광하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막상 홍콩에 가서 보니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마카오(Macao·澳門)에 가서도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일반인은 말할 것 없고 관광호텔에 근무하는 직원들조차도 포르트갈 말을 아주 간단한 몇 마디 밖에는 모른다는 것이다.

얼마 전 홍콩 행정장관 도널드 창(曾陰權)이 정무사장(司長) 시절 입법회(의회)에서 의원들에게 “앞으로 월 한 번씩 영어로만 회의하고 토론하자. 직원들 영어실력이 형편없다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이러다간 외국기업들이 홍콩을 멀리하면 어떻게 하냐?”고 제언했다고 하니 홍콩의 영어를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잘 알다시피 홍콩은 난징조약(南京條約)에 따라 1842년부터 영국이 통치하다가 1997년 중국에 반환됐고 마카오(Macao·澳門)도 1887년부터 1999까지 포르투갈(Portugal)이 통치한 곳이 아닌가.

서양의 식민통치는 일본이 우리에게 했듯이 언어말살정책을 펴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중국사람들이 자기네 말을 줄기차게 아끼고 지켜낸 것인지. 화교(華僑)들이 외국에 오래 살면서도 2·3세들까지도 모국어(母國語)를 잊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정답인 것 같다.   

80년대 초에 미국에 연수(硏修)갔을 때의 일이다. 비행기의 중간급유(給油)를 위해 앵커리지(Anchorage) 공항에서 한 두시간 머물게 되어 공항 면세점을 둘러봤더니 온통 일본 세상이었다.

100여개가 넘는 상점들이 호객광고부터 손님에게 대하는 말까지 모두가 일본말이었다. 미심쩍어서 몇 개 상점에 가서 머뭇거렸더니 점원들이 일본사람 행세를 하고 있었으나 알고 보니 한국사람이었다. 대강 둘러봤더니 상점들의 70% 이상이 한국사람들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분개했으나 누군가가, 그때 한창 일본 관광객이 세계를 누비고 다녔을 때였는데 그들은 꼭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상점에서만 쇼핑을 하기 때문에 우리 교민도 일본 상점처럼 행세하고 있다고 귀띔해주는 것이 아닌가. 가난한 나라의 백성으로 이국 만리타관에서 먹고살자니 도리가 없겠지 하고 체념하고 말았다.  

연수 마지막 코스로 하와이(Hawaii)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연수생 일행이 하와이 총영사의 초청을 받아 함께 차를 나누면서, 총영사가 하는 말이 1900년대 초반에 사탕수수밭에서 반노예처럼 고생했던 우리 노동자들이, 영어를 익혀 수월한 일자리로 옮겨가는 일본사람들이 부러워서 당사자들은 어쩔 수 없지만 자식들만이라도 굴욕적인 삶을 면해주고자 집안에서조차도 우리말을 하면 매질을 해가면서까지 영어를 익히도록 했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우리말을 멀리해야만 했던 슬픈 역사이니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만은….

요즘 우리 국어의 현주소는 어떨까. ‘수돼지’ ‘숫돼지’ ‘수퇘지’ ‘숫퇘지’ 중 표준어를 고르라는 것과, ‘쌍용’ ‘백분율’ ‘가정난’ ‘하마트면’ 중 옳은 것을 고르라는 것으로 학년초마다 논술과목을 배우는 KAIST 신입생 700여명이 치르는 국어시험 문항이다.

학생들의 맞춤법이나 표준어, 띄어쓰기 같은 기본 국어실력이 들쭉날쭉해서 학교측은 이 시험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지도한다고 한다.(수퇘지와 백분율이 정답이라 함)

서울대 국어교과서 첫 단원 제목이 ‘韓國思想 硏究의 構想(한국사상 연구의 구상)’인데 국어담당 연구교수가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제목을 읽어보라고 하면 硏究(연구)까지는 절반 가량이 제대로 읽지만 構想(구상)까지 맞히는 학생은 열에 한 명도 안 된다고 한다.

나라를 잃었어도 뜻 있는 우리 선배들이 꿋꿋이 지켜온 우리말,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과적이라는 한글, 훌륭한 한글이 있었기에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어 왔는데도, 우리 글 우리말에 이렇게 소홀해서야 하고, 한글창제 562주년을 넘기면서 해보는 넋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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