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보도연맹 당시 총알을 맞은 소나무. 일운면 지세포에 위치. @거제신문DB
거제 보도연맹 당시 총알을 맞은 소나무. 일운면 지세포에 위치. @거제신문DB

거제지역의 민간인 희생사건은 부역혐의사건·국민보도연맹사건·군경토벌 민간인 희생 사건 등으로 한국전쟁 발발 전후 발생했다. 

지난 2006년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9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거제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는 최소 475명에서 최대 800여명이다. 대다수가 좌익활동 경력이 전무하고 좌익사상과는 무관한 20~40대 농·어민이 대부분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3월부터 약 3개월 동안 38명의 민간인을 좌익에 협조한 협의로 구조라리 인근 야산 등에서 학살했다. 

1949년 4월부터 1950년 4월까지 거제지역 야산대(빨치산) 토벌 명목으로 백골·호림·백호·비호부대가 거제에 진주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특히 동부면 구천계곡 사건은 10여 차례에 걸쳐 민간인 310명이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1949년 7월 연초면 송정리, 1950년 4월 일운 구조라·둔덕 방답·장승포 신사 등지에서도 민간인 70여명이 학살당했다. 

거제 국민보도연맹 학살 1950년 7월21일 보도연맹원 731명이 호출장을 받고 거제경찰서에 강제 집결한 뒤, 7월24부터 26일까지 3일 동안 지심도·외도·칠천도 앞바다에 400여명이 철사 줄에 묶여 수장됐다. 이후 1950년 8월까지 총살·수장 등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계속 이어졌다.

당시 수장된 희생자들은 손과 발이 묶인 채 현해탄 건너 대마도까지 밀려갔고 1950년 10월12일 대마신문(對馬新聞)에는 거제에서 수장된 보도연맹 희생자들이 일본 대마도 방면으로 밀려왔다고 보도했다.

△1950년 9월12일자 대마신문에 게재된 학살 관련 신문기사.
△1950년 9월12일자 대마신문에 게재된 학살 관련 신문기사.

 

★ 한국사 산책 = 국민보도연맹사건

국민보도연맹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소집·구금하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 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 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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