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거제수필문학 회원

오늘은 사찰순례를 떠나는 날이다. 초여름 비가 그친 하늘가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산야는 초록빛으로 생기가 넘친다. 아침 일찍 거제에서 출발, 점심때가 지나서야 운문사에 도착하였다.

운문사는 조계종 사찰로, 이름난 비구니 절이다. 이 절은 사방의 산들이 꽃잎처럼 겹겹이 싸여 있는 듯 산자수명한 절승의 명당지이다. 여기서 약 3㎞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사리암邪離庵은 1,400m의 호거산虎居山 중턱 바위 틈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암자다.

주차장 위쪽에 사리암이라 적어놓은 묘비 같은 낡은 빗돌이 암자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산록 따라 차가 오를 수 있는 시멘트 포장길이 약 300m 정도 되고, 암자까지는 겨우 두어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자연석을 깔아 놓았다. 하늘을 가린 숲속을 헤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는 길 중간쯤에 자연 약수가 길손의 목을 적시게 한다.

오르내리는 신도와 등산객들의 목을 적셔주는 이 물은 청정법신처럼 귀한 생명수 역할을 한다. 절벽 아래 간신히 발을 붙이고 서 있는 사리암은 자연 암반을 잘 이용하여 처마 끝에 제비집처럼 층층이 지어져 있다. 숲 사이로 떠가는 뭉게구름이 사리암 위에서 연꽃처럼 피어나는 풍경은 도솔천의 극락세계에 온 듯하다.

꽃처럼 곱게 피어날 나이에 삭발을 하고 세속의 번뇌를 씻어버린 여승(비구니)의 모습이 선녀처럼 아름답다.

사리암이라 하면, 부처님의 진신 사리舍利나 득도한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의 사리암은 그렇지 않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 이곳 바위틈 아래서 한 수도승이 살고 있었다. 민가와는 거리가 먼 산중의 험한 바위 밑에서 수도를 하기 때문에 식량을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고민거리였다.

수도승은 그 소원을 빌고 빌었다. 어느 날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그 소원을 이루게 해줄테니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다음날 바위 아래로 가보니 하루 먹을 쌀이 있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많은 수도자들이 몰려왔다.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 분의 쌀이 나왔다.

그러던 어느 해 욕심 많은 어느 수도승이 쌀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뚫으면 쌀이 더 많이 나올 것이란 생각을 하고 그 구멍을 크게 뚫었다. 쌀이 더 많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 구멍에서 쌀 대신 물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욕심 때문에 벌을 받었다.

쌀이 나왔던 곳을 처음에는 쌀굴이라 하다가, 그후 고려 초(930년) 보양寶壤국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망했던 곳이라 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버린다는 뜻에서 사리암邪離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암자는 관음보살을 주불로 한 관음전과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신 천태각天台閣 등이 있다. 나반존자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중국 천태산 정상에서 혼자 득도하여 성인이 된 분이다.

나반존자는 미륵불이 나오기 전 말세에 나타나서 중생을 구제하여 재앙을 없애주고 소원을 이루게 할 구원주가 될 분이라 하여, 큰 원력을 가지신 분이다. 그래서 나반존자에게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그 원력을 받고자 하는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서 철야기도 증진을 하고 있다.

이 암자까지는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돌밭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것부터가 기도하는 마음이다. 기도란 소원을 비는 것이 제일 우선이지만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하지만 온갖 망상과 번뇌는 노도처럼 일어나고 버리려고 하는 욕심은 태산같이 쌓인다.

인간이 백 년을 산다고 한다면, 나는 이제 서산에 걸린 해와 같다. 살아온 길을 되돌아 보면, 잘했던 것은 하나도 없고 잘못한 일만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후회도 많고 미련도 많다.

이제 인생을 정리할 단계가 온 것 같다. 지금 어디쯤 와 있으며, 어디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가는 길이 올바르고 지혜로운지를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기도를 해 보지만 좀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그동안 많은 세파를 겪으면서 쌓이고 쌓였던 욕망이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다. 꿇어앉아 합장한 자세로 몸부림을 쳐보지만 온갖 잡념과 망상만 허공을 맴돈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태양이 산 위로 솟아오른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영롱한 사리가 되어 찬란한 빛을 쏟아 놓는다. 그 빛을 본 순간, 아! 이것이다 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저 태양처럼 환생하는 마음으로 쌓인 찌꺼기와 모든 번뇌를 비우고 청정한 마음으로 새롭게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어둡던 마음이 밝아왔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