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금성은 1872년 거제부사로 부임한 송희승(宋熙昇)이 1873년 쌓은 성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 2016년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19세기(조선시대)가 아닌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축성한 성곽임이 밝혀졌다. 

송희승은 기존에 있던 수정봉산성을 증축해 옥산성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옥산성은 1873년 3월6일 처음 축성을 결정한 후 3월15일 축성 준비를 거쳐 5월에 공사가 시작돼 1873년 10월15일에 완공했다. 옥산성은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거제 전역에서 2만냥의 축성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때문에 송희승은 1874년 7월 거제부사 임기를 마치고 강원도 삼척영장(三陟營將)에 임명받고 거제를 떠나는 중 옥산금성 축성을 쌓기 위해,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는 등 백성에게 큰 부담과 막대한 피해를 줬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한다.

옥산성이 증축된 지 2년 후인 고종 12년(1875) 장목면 대금산에는 중금산성도 만들어졌다. 기록으로는 옥산성이, 구전으로는 중금산성이 조선시대 마지막 쌓은 산성이다. 

중금산성은 관(官)의 주도가 아닌 백성(民) 스스로 만들어낸 방어시설이다. 거제군지에 따르면 중금산성은 고종 12년(1875)에 주민 강석원(姜錫元)·정춘식(鄭春植)·김정헌(金正憲) 등 세 사람이 장목면 시방·율천·대금마을 주민을 동원해 식량을 저장하고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고 전한다.

옥산성과 중금산성이 증축 및 축성될 즈음에는 1866년 병인양요·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1875년은 강화도조약의 시발점이 된 운요호사건이 발생하는 등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였다.

거제옥산금성. @거제신문DB
거제옥산금성. @거제신문DB

 

★ 한국사 산책 = 19세기 말 외세 침입

● 병인양요= 1866년 조선이 천주교 신자 8000여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를 빌미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다. 
● 신미양요= 1866년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SS General Sherman)'호의 침입을 조선이 무력으로 제압하자 1871년 미군이 조선의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다.
● 운요호사건=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하기 위해 측량을 핑계로 군함 운요호를 보내 강화도와 한강 일대에 포격을 가하고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 사건이다. 훗날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강요해 그 이듬해 불평등 조약인 1876년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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