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거제수필문학 회원
김용호 거제수필문학 회원

겨울이 시작되려나 보다. 뒷산의 오솔길에는 떨어진 갈잎들이 우수수 몰려다니거나 쌓여 있다. 바스락 바스락 조용한 숲길에서 갈잎을 밟으면서 걷는다. 

자주 걸어서 익숙한 길. 그러나 산의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다. 길에서는 보이지 않던 나무나 바위들이 모든 잎들을 떨어뜨려버린 계절에서는 그대로 훤히 내 눈에 들어온다. 저렇게 가까이 있었던가. 그동안 나뭇잎들로 보이지 않았었구나. 

그렇구나. 겨울이 되면서 그간에 서로 두었던 거리를 이제 접어두고 가까이 기대어 가려는 모습이구나. 봄과 여름에는 서로가 햇빛을 다투려고,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나무들끼리 다툼도 있었을 테지. 땅속에서도 경쟁하지 않았을까. 영토를 많이 차지하려 욕심도 내었을 것이고, 수분을 서로 많이 뽑아 올리려 뿌리 싸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 계절들을 돌아보며 조용히 내년을 꿈꾸는 계절. 추운 겨울을 버텨야 하는 시간. 햇볕과 자리를 두고 다툴 일도, 수분을 두고 뿌리 경쟁을 할 까닭도 없다. 서로가 벗은 맨몸인 채, 무슨 부끄러움인들 있을 것이냐. 가까이하여 조곤조곤 이야기들을 나눠 본다. 지난 여름 태풍 때, 서로의 가지들을 맞대고, 아니 마주 잡고 비바람을 한껏 버텨내던 무용담에서부터 낡아 썩어진 가지에 자주오던 딱다구리며, 소리소리 요란했던 직박구리 재주놀이며, 짝 잃어 애처롭던 어치 이야기들을 이어가고 있는가.

바람은 한결 자유로워졌다. 걸릴 것 없는 가지 사이로 씽씽씽 내달린다. 내벗어던지고 찬바람 앞에 서면 얼어서 껍질은 터져도 가슴은 훈훈하여 오히려 정겨워지는가. 그럴 것이다.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따뜻한 언어로 서로가 마주하여 너는 참나무, 나는 밤나무, 따지지 않고 가까이 오라며 서로의 손을 내밀 것 같다. 

사람의 삶도 크게 다를 것 없을 것이다. 금수저 아닌 다음에야 별스런 야망이 있었겠는가. 그저 직장 하나 제대로 붙잡고, 각시에 딸 아들 건사 잘 하고, 그런 것도 야망이었는가. 그러나 돌이켜 보면 젊었던 시절에는 나름의 경쟁심도, 질투심도 있었다. 아니, 보다 크게 성공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젊음이라는 속성이 원래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이제야말로 야망이 필요없는 계절을 맞이한 것이 아닌가. 아직도 혹시 그런 야망의 끄트머리가 남아 있다면, 저 갈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처럼 훌훌 내 던져야 되는 것 아닌가. 진실로 나를 바라보자.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애련과 질투, 그리고 욕심의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은가. 반성해야 한다. 

그래야 할 것이다. 이제 곧 산등성이, 억새의 줄기와 꽃들이 갈바람에 쓰러질 듯 춤추고 있을 것이다. 민들레 털씨 같은 씨앗들을 바람에 홀홀 날릴 것이다. 나의 남은 젊음의 찌꺼기들을 오롯이 실어 보내야 할 것이다.

겨울을 맞아 나무들은 서로를 가까이하려 한다. 함께 의지하면서 추운 계절을 버티려 한다. 그동안 나는 어떠하였는가.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코로나19를 이유로 가까웠던 친구들에게 소홀하지는 않았는가. 소홀하였다. 그 쉬운 전화 한 통화 다정하게 한 적이 있었던가. 단톡방에 정감이 담긴 댓글을 제대로 올린 적이 있었나. 겨우 어쩌다 이모티콘 올린 것이 전부 아니었던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면 시간 내어 얼굴 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어디든 곁에 있는 손전화가 있어 버튼 하나로도 소통하는 세상임에도 그것마저도 인색했으니 달리 변명의 여지도 없다. 산길을 되짚어 내려오면서 반성한다. 

반성한다고 당장 고쳐지기야 하랴마는 그래도 다짐한다. 이제 몇 남지도 않은 친구들에게 따뜻한 안부전화라도 일일이 해봐야겠다. 

차가운 바람이야 산 오를 때와 큰 차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마음먹어서 그런지 나의 발걸음은 한결 경쾌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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