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5년(1510) 4월4일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과 대마도 왜구가 전선 1000척을 이끌고 거제 영등포(永登浦)를 에워싸 공격하면서 삼포왜란이 시작됐다.

당시 영등포 군사들과 민중들은 수적인 열세를 딛고 방어하자 왜구들은 군사의 반을 근처 주물도(主勿島·이수도)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반은 웅천 제포와 동래 등으로 보내 약탈했다. 

4월5일 왜구 무리가 큰 배 5척을 타고 하청리(河淸里)에 정박하자 거제 현령(巨濟縣令) 오세한(吳世翰)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구을 공격했고 왜구들은 곧바로 배 4척에 나눠 타고 바다로 도망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력을 모은 왜구의 공격에 영등포진이 함락당하고 왜구는 거제도 해안마을 곳곳을 노략질했다. 삼포왜란 이후 조선 조정에 보고된 피해 상황을 보면 웅천 58명·제포 53명·부산포 91명·영등포 95명으로 영등포가 가장 많았다. 삼포왜란은 조선의 대일 외교와 관련된 중요 사건이었지만 거제지역사에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이다. 

중종실록에 기록된 91건의 거제 관련  중 37건이 삼포왜란과 관련된 기록일 정도로 당시 거제는 삼포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당시 실록에는 영등포진이 함락당해 성벽이 무너지고 병선이 불탔으며 하청·연초·장목 일대가 왜구에 침략 당해 민가에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포왜란 이후 거제의 수군진은 경상우수영을 비롯해 영등포·옥포·지세포·조라포 성 머리와 성 밑에 녹각(鹿角)을 설치하고 웅덩이와 말목(末木)을 설치했으며 기존 나무로 된 성문은 철판을 덧붙이는 등 방어를 강화했다. 

이후 조선 조정은 삼포를 폐쇄하고 대마도와 통교를 단절했으나 대마도주는 무로마치 막부를 통해 조선과 다시 교역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조선은 1512년 일본과 임신약조(壬申約條)를 맺게 된다.

★ 한국사 산책 = 삼포왜란과 임신약조

삼포왜란은 1443년 계해약조(癸亥約條)를 통해 삼포로 들어오는 대마도의 세견선을 감시하는 법규를 엄격하게 적용하자 불만을 품은 왜인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삼포왜란 당시 왜인들은 거제 영등포를 시작으로 제포와 부산포를 잇달아 함락시키고, 웅천을 공격하는 등 경상도 해안 일대에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조선은 삼포왜란 2년 뒤인 1512년 일본과 임신약조(壬申約條)를 맺고 왜인과 교역을 다시 시작했다. 임신약조는 세견선을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하고, 해마다 대마도주에게 내리는 쌀과 콩인 세사미두(歲賜米豆)도 200석에서 100석으로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왜인의 삼포 거주를 금지하고 제포만 개항하도록 하는 등 왜인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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