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숙/거제수필문학회원

십오 년 만에 듣는 친구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첫 마디가, 라면만 보면 내 생각이 났다는 것이었다. 커다란 전기밥솥에 라면을 끓여 신김치와 먹던 기억 속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고 했다.

남편에게까지 라면과 친구 이야기를 했다고 한 걸 보면 꽤 즐거운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친구와의 대화는 어린시절로 이어졌고, 이야기 보따리 속에서 즐거움과 아픔과 아쉬움이 자꾸자꾸 쏟아져 나왔다. 친구는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듯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다.

“참, 조선일보!”

전화를 하게 된 동기는 내 첫사랑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저편의 세계가 그리움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소년은 작고 마른 편이었다. 중학교 시절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차분한 성격 때문인지 친구들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산에서 학교를 오고 간다는 것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아련하지만, 소년이 결석을 한 지 삼일째 되는 날 우연히 그의 아버지 장례식에 가게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으레 행하는 장례식 모습이 아니었다. 리어카에 관을 싣고 그 위에 가마니를 덮어 학교 뒷길 공동묘지로 향하고 있는 모습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리어카 뒤를 따르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더 죽음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며칠 후 선생님과 친구 몇 명이 소년의 집을 방문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우리 동네와는 몇십 리 떨어진 싶은 산속 작은 절이었다. 이곳에서는 새벽에 나와야 수업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은 초췌했지만 눈동자가 너무 맑아서 쳐다보는 내 눈이 시렸다. 한쪽 팔을 전쟁터에서 잃었다는 국어선생님은 소년과 나에게서 소질이 보였는지 자주 불러 문학에 대한 얘기를 들려 주셨고, 시詩 공부를 시키셨다.

같은 주제나 소재를 가지고 서로 글을 써보기도 하면서 읍내에서 열리는 백일장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가정과 기술 시간이 되면 반이 바뀌었다. 소년은 그 시간에 언제나 내 자리에 앉았다. 늦어서 미처 앉지 못할 때는 부탁을 해서라도 내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행동이 반복되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별다른 마음의 감정이 없었던 나는 소문만 가지고 따질 수도 없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소문은 이어졌고, 그냥 덮어두기에는 예민한 사춘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습자지에 붓으로 정성스럽게 쓴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을 계기로 만나게 되었고, 예기치 않았던 그의 고백을 듣게 되었다.

그냥 내가 좋다고 했다. 깊은 산속에서 시린 달빛을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달빛을 따라 마을로 내려와 우리 담벼락에 가슴을 한동안 대고 있다가 되돌아가곤 했단다.

그 겨울이 소년이 가졌던 시간 중에 제일 희망에 부풀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소년은 학생회장이 되었고, 우리는 문학과 학교 일을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기 시작했다. 친구의 목소리는 자랑스럽게 들떠 있었다.

“조선일보에 크게 났더라. 실린 사진도 멋있어 보이고 그에 대한 평론도 훌륭한 것 보면 시인으로서 성공한 것 같더라.”

친구의 들뜬 목소리에 맞장구를 치지 않는 걸 느꼈는지, 약간 새침한 목소리로 신문을 꼭 보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며칠 동안 거울을 자주 보게 되었다. 거울 속에 보이는 내 모습으로는 차마 신문을 사서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뒤척이며 시간을 되돌려 보지만 수십 년 전의 소년의 모습은 어디에서라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몇 주일이 흘렀고 차츰 설렘도 망설임도 후회스러움도 퇴색되어 갔다. 새벽이었을까. 이른 아침이었을까. 잠결에 받았지만 전화 속의 들뜬 목소리로 인해 단번에 친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중앙일보다.”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덧붙였던 신문 이야기는 퇴색되어 가던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다시 선명하게 떠올리게 했다. 당장이라도 신문 속의 소년을 만나고 싶었지만, 직접 손을 내밀 용기가 나지 않아 스무 살의 아이에게 부탁을 했다.

주변의 어디에도 찾는 신문은 없다고 했다. 구슬땀 투성이었지만 먼 곳까지 가서라도 사오겠다는 아이의 의지는 내 속의 간곡함을 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신문 속의 소년은 십수 년 전 산사에서 보았던 청명함으로, 고독함으로 소녀에게 다가왔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지만 그 세상은 눈이 되어 금방 녹아버렸고, 두 사람만이 덩그렇게 남았다. 오랜 시간 침묵했고, 그렇게 바라만 보았다.

소년의 맑은 눈동자 속에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나무와 하늘, 풍경 소리와 바람 소리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렇게 오래 바라보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신문을 접었다.

그리고 서점에 갔다. 하얀 시집을 사 들고 나오며 비록 현실 속에 살지만 이상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아서 더 오래 그 소년과 소녀를 기억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가을은 온통 코스모스로 만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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