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송자/거제수필문학 회원

오후에는 서울 공덕교회가 80주년 기념교회로 세운 키붕콕 원주민 마을로 탐방을 떠났다.

산 넘고 물 건너가는 계곡 협소한 길이었다. 김현숙 선교사는 그 마을 사람의 오토바이에 함께 탔고, 우리는 승합차로 덜컹거리는 길을 가다가 냇물이 불어서 차에 내려서 옷을 걷고 물을 건넜다.

그 마을에서는 손님이 온다고 전통 옷을 입고 추장과 마을 사람들이 전통춤과 노래를 하였고 우리도 함께 춤을 추었다.

특이한 것은 5, 6세 아이들이 나와서 독창과 합창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몸짓으로 노래를 하였다. 부모들의 가난과 아픔이 아이들에게 전해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깡마르고 살점 없이 못 먹고 헐벗은 모습에서 저렇게 맑고 고운 노래를 부른다니 마음이 찡하였다.

공능교회에서 준비해 온 옷을 아이들에게 한 벌씩 나누어 주었다. 행사를 마치고 김현숙 선교사의 하는 일들을 안내받았다. 양어장을 만들어 고기를 길러 팔고 짐승을 길러서 마을의 소득을 얻게 하고 농촌을 잘살게 하며 지도자의 일도 끊임없이 연구하는 선교사의 수고를 알 수 있었다.

발렌시아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식을 마치고 키온톳 원주님 마을로 출발하였다. 그곳에도 서울 공덕교회가 세운 기념교회가 있었다. 도착한 후 먼저 가까운 원주민 주택을 방문하였다.

이 집은 그래도 잘사는 집이라 방이 두 칸이다. 우리의 촌락처럼 박넝쿨이 지붕 위로 올라가고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방이라는 곳은 원두막처럼 대나무로 엮어 놓았는데 밤이면 대나무 아래 맨땅에는 닭과 염소가 살고 있어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잔다고 하였다.

이 집도 개도 방에 같이 자고 원숭이도 천장에 있고 방에는 병든 주인 아저씨가 있었다. 벽과 벽에는 보자기를 끈으로 엮어서 저녁에는 그 위에 아이들이 자고 아래는 어른이 잔다고 하였다. 위생적이지 못해 말라리아 병이 많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마을의 여자 추장도 나와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추장은 자기 어머니가 자기에게 준 오래된 목걸이를 우리 목사님께 걸어주었다.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았지만 최대의 정성이었다. 마을을 돌아본 뒤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돌아오면서 병들어도 병원에 못 가는 원주민이 내내 눈에 밟혔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회비가 4천 원이지만 공책, 연필 살 돈이 없어 학교를 못 보낸단다. 거의 문맹자이다. 우리나라 5, 60년대 같았다.

남자들은 옥수수 벨 철 8시간 노동에 5천 원 임금을 받는데 그것도 일이 떨어지면 일할 곳이 없고 전 농토의 90%는 부자들의 몫이고 서민들은 농토도 없고 일거리도 없어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 빈민촌을 보았다. 길이나 도로변에 박스나 판자 같은 것으로 집을 짓고 사는 풍경이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민망하였다. 어릴 적 미국의 원조로 받은 공책, 연필로 공부한 생각이 났다. 그날 저녁에 우리는 평가회를 하였다. 참석자들은 저마다의 느낌을 이야기하였다.

김현숙 선교사님은 통영 사람으로 통영중, 부산여고, 이화여대를 나온 엘리트였다. 서울 초동교회에 14년이나 부목사로 사역하시다가 이곳에 온 지 6년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손님이 올 때마다 무거운 가방을 싣고 내리고 갈 때까지 배웅하며 여자의 몸으로 상상도 못할 거친 일을 하고 있었다. 결혼도 안한 처녀로서 그가 안쓰러웠다. 결혼을 하여 가족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한다면 더 힘이 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하루는 펄팜이라는 휴양지로 관광을 가기 위해 8시에 유람선을 탔다. 어디를 가나 야자수는 아름다웠다. 하늘의 구름이 시시각각으로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국의 경치를 감상하며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수상가옥이 있는 선착장이었고 야자수 그늘 아래 잘 쉴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었고 하얀 모래가 비췻빛 물속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안내차를 타고 그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수목을 구경하고 난 후 목사님과 남편은 수영을 하였고 사모님과 나는 침대에 누워서 맞은편 섬과 경관을 감상하였다.

그림에서만 보던 곳을 하나님 덕분에 그림 속 주인공이 되어 바라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 나도 물속에 들어가서 수십 년 해보지 못했던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헤엄을 쳐보았다. 젊은 남녀들이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수영하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다음날 국제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헤어지면서 병든 원주민이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던 모습이 눈에 밟혀 지갑 속에 남아 있던 200달러를 드리면서 병원에나 한 번 데리고 가보라고 하였다. 김 선교사님을 두고 오는 심정이 꼭 동생을 이국 만리에 두고 오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다음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잡았던 손을 놓으면서 우린 서로 눈시울을 붉혔다. 마닐라 공항을 떠나 부산으로 돌아오는 동안 가난에 찌들린 채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번 칠일간 여행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많은 감동과 감화를 주신 선물로 나의 삶과 신앙생활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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