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칼럼위원
윤일광 칼럼위원

고려 충렬왕 때 대부경 박유(朴褕)가 '일부다처제'를 주장했다. "신하들에게 첩을 두게 하옵소서. 벼슬이 내려갈수록 첩의 숫자를 줄여서 서민은 아내 하나, 첩 하나를 둘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하시옵소서."

이 간 큰 남자의 '첩제도' 주장에 대신들은 고민에 빠졌다.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아내가 무서워 대놓고 찬성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건이 하나 터진다. 연등회 때, 박유가 나타나자 한 노파가 "저 놈이 축첩을 청한 요망한 늙은이다"고 하자 참석한 여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욕을 쏟아 부었다. 고려 여인들의 분노로 결국 이 문제는 유야무야되면서 시행하지 못했다. '고려사' 열전 박유편에 기록돼 있는 일화이다.

고려시대 여성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여자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다. 재산상속은 기혼과 미혼, 장남과 차남,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는 이른바 균분상속(均分相續)이었다. 이와 함께 부부별산제(夫婦別産制)로 아내의 재산은 아내의 것이다. 만일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에는 그 재산이 남편의 집에 귀속되지 않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장손의 제사책임은 조선 성리학 이후이며 고려 때는 아들 딸 가리지 않았다. 남편이 사망하면 여자도 호주가 될 수 있었다. 남녀의 자유로운 성문화로 여자들은 마음에 드는 남자와 교제한 뒤에 혼인할 수 있었고, 이혼과 재혼도 대체로 자유로와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여성의 재혼은 문제 삼지 않았다.

고려 후기의 학자 이곡(李穀)이 공녀문제를 논하면서 "차라리 아들을 내보낼지언정 딸과 함께 살기를 바란다."는 이 한마디가 당시 부모들은 딸을 더 소중히 여겼다는 근거가 된다. 시집가면 출가외인이 되는 조선사회와는 달리 굳이 아들과 딸을 차별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여성의 정치 사회적 활동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남녀가 평등한 사회라고는 볼 수 없지만, 가족 내에서만큼은 거의 대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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