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예결위에서 있었던 일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예산을 두고 여야의원이 옥신각신하다가 A의원이 반말을 하자 B의원이 열 받아 소리쳤다. "야, 니 몇년생이야?" 본질은 사라지고 막말에 고성만 오가다가 회의는 종치고 말았다. 싸우다가도 불리하면 "니, 몇 살이고?"를 따진다. 논점과는 아무 상관없는 말로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전술이다. 논리학에서는 이를 일탈오류의 한 방법인 '주의전환오류'라 한다. 영어로는 레드헤링(red herring)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온 날짜 계산에 민감하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끼리 대화를 잘하고 있다가도 "혹시 몇 살이세요?" 하고 물어 자기보다 한 살이라도 적으면 그때부터 태도가 바뀐다. 기어이 형과 아우라는 수직관계가 확인돼야 안심을 한다. 계산만 대면 그냥 알아서 나이로 줄을 서는 서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이가 순서를 정하는 기준이 아닌데 말이다.

나이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맹자의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들먹거린다. 그래서 애먼 유교가 욕을 먹는다. 유교사회에서는 숫자에 불과한 나이를 기준으로 위 아래를 정하지 않는다. 장유유서의 기본은 종친 간의 항렬 순서로 친족관계의 윤리이며, 종법(宗法)질서의 가치다. 그래서 항렬이 낮으면 백발의 노인이라 하더라도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존대해야 했다. 사회윤리에서는 윗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禮)와 경(敬)사상이 바로 장유유서인 것이다.

나이 따지는 문화는 근대문화의 산물이다. 학제가 도입되면서 모든 학생이 같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같은 나이에 졸업하면서 생긴 것이다. 나이가 권위의 복종수단이 되고, 나이로 편 갈라버리는 세대갈등도 장유유서의 자의적 해석 탓이다.

대한민국이 서구처럼 차별 없는 인간사회가 되려면 나이가 마치 군대 계급 같은 인간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니, 몇 살이고?"는 묻지 말자. 그건 생물학적 숫자일 뿐이다. "나이 그거,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