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미 수필가
이은미 수필가

꿈을 잘 꾼 어느 날, 기대감을 가지고 로또복권을 샀다. 추첨하는 시간에 맞춰 TV를 틀었는데 깜짝 놀랐다. 화면에 굉장히 낯익은 숫자들이 연달아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내 심장이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숫자중 세 개의 숫자를 외우고 있던 나는, 나머지 숫자를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지갑에서 로또용지를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숫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확인하니, 아! 이게 웬 횡재인가. 하나만 틀릴 뿐 다섯 개의 숫자가 맞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 나에게서 일어나다니.

안방에서 컴퓨터로 바둑을 두고 있는 남편에게 달려가 들뜬 목소리로 이 놀라운 소식을 알렸다. 남편은 신기해하며 "숫자 하나가 틀리면 2등인 건가?"라며 묻는다. 로또에 대한 상식이 없었던 우리는 당연히 2등이라고 믿었다. 검색해 보니 2등 당첨금이 무려 삼천만원이 훌쩍 넘는다.

순간 갑자기 생긴 이 많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때 컴퓨터로 이것저것 살펴보던 남편이 "어? 2등이 아니네"라며 보너스 숫자가 맞아야 2등인데 우린 3등이라고 한다. 일순 실망감이 밀려왔다. 소중한 내 돈 삼천만 원을 누구에게 뺏긴(?) 기분이다. 그럼 3등은 당첨금액이 얼마냐고 시큰둥하게 묻는 나에게 남편은 웃으면서 백 육십만 원이란다. '에게, 겨우?'라는 생각과 '그래도 백육십이 어디야, 공돈으로 그 돈이면 큰돈이지' 하는 생각이 교차됐다.

월요일 오전, 설레는 마음으로 은행에 가서 당첨된 복권용지를 보여주니, 은행 직원이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셨냐며 부러워했다. 세금을 제하고 받은 돈은 백 삼십만 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시장에 들러 과일을 잔뜩 사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평소에 들었다 놨다 했던 샤인머스켓도 샀다. 부자가 된 기분이다. 대학교 기숙사생활을 하는 두 딸에게 선심이라도 쓰듯이 용돈으로 십만 원씩 보내주고 나니 백만 원 남짓 남았다.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집으로 돌아와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준비를 하는데 남편이 큰소리로 불렀다. 물 묻은 손을 닦으며 갔더니 남편은 대뜸 당첨금을 다른데 쓰지 말고 생활비에 보태자고 한다. 나는 펄쩍 뛰었다. 이건 내 행운인데, 내 복으로 얻은 돈인데 왜 이걸 생활비로 쓴단 말인가. 난 단호히 거절했다. 가까운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특별한 날에나 먹는 비싼 밥 한끼씩 사 줄 생각에 얼마나 행복했는데….

남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결국 부부싸움으로 번졌다. 급기야 결혼은 왜 했냐는 근원적인 문제까지 들먹거리면서 서로 말문을 닫고 각자 방문도 닫았다. 밥도 하기 싫어져서 혼자 앉아 조용히 생각을 해본다.

얼마 되지도 않는 이 돈 때문에 언성을 높인 것이 맘에 걸린다. 괜히 로또에 당첨이 돼서 서로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이 돈이 아니었으면 서로 상처를 주는 말도 하지 않았을 터인데, 돈이 괘씸했다. 문득 인터넷에서 본 로또 1등 당첨자들의 불행한 결말이 떠오른다.

나는 바로 지갑에서 백만 원을 꺼내어 봉투에 넣고는 안방으로 가 남편에게 건냈다. "당신 말이 맞아. 생활비로 쓰는 게 제일 낫겠어"라고 말하며 멋쩍게 웃었다. '혼자서 생활비 대느라 매달 마음 고생하지?'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제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돈 걱정을 하지 않게 해준 남편이 고마웠다. 이렇게 조금이나마 우리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에 감사하자며 내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남편이 큰 소리로 묻는다.

"니도 라면 먹을래?"

한 번도 나에게 라면을 끓여준 적이 없는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파와 계란과 고마움과 쑥스러움이 들어간 라면은 지금까지 내가 먹어 본 라면 중 최고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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