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배 수필가
심옥배 수필가

참 곱다. 숲을 걷노라니 나무의 가을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초록으로 무성하던 여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숲속의 변화도 그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단풍이 들고 낙엽 지는 데도 저들의 질서에 맞춰 순서대로 흐르고 있나보다. 가을은 더욱 깊어져 그윽하고, 상수리나무 잎은 벌써 지고 있는데 단풍나무 잎은 아직 한창이다.

가을 숲길로 들어서자마자 '아!'라는 짧은 감탄사만이 입 밖으로 새어나간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잎을 피우고, 떨구어 내기도 하는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한낱 인간의 오만함이 부끄럽기만 하다. 붉게 물든 단풍을 보느라 위로 향하였던 고개가 자꾸만 숙여진다. 터벅터벅 제멋대로 걸었던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작은 새소리에도 조용히 귀 기울이며 쉬엄쉬엄 걷는다.

산뜻한 바람을 타고 묻어오는 가을숲의 향기며, 나무 틈 사이로 비추는 청명한 하늘빛은 계절만큼이나 풍요롭다. 낙엽이 쌓여가는 숲길의 감촉과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전해져오는 사그락 거리는 느낌. 낙엽이 쌓인 길을 보면 걷고 싶어지는 것은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저 묵묵히 걷는 것만으로도 지친 일상에 위안을 가져다준다. 저마다의 색으로 물든 처연한 잎사귀들이지만 그 슬픔마저도 아름답게 보인다.

숲에서 한가한 시간을 가질 때마다 낙엽을 주워 모아둔다. 모아둔 그것으로 겨울 내내 '낙엽차'로 마시기 위해서다. 덖지 않고 펄펄 끓인 물에 낙엽을 넣어 우려낸다. 자연의 향기가 그대로 배어 그 맛은 참으로 오묘하다. 마음의 체증이 내려가고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낙엽차를 마시면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아릿함이 풀린다. 그래서인지 우울증 환자에게도 좋다. 그러고 보니 낙엽 한 잎에는 사계절의 비와 바람, 햇빛이 담겨 있으니 온 우주를 품고 있는 것 같다. 붉게 물들어간다는 것은 떨어질 때를 아는 것이며, 욕심을 버리는 일이다. 나뭇잎은 오직 순수한 자연만을 간직한 채 땅에 떨어진다.

차를 마시기 위해 상수리나무 아래 자리를 폈다. 단풍잎과 달리 상수리나무는 참나무라 그 맛과 향이 일품이다. 상수리나무 잎을 주워 차로 우려낸다. 깊은 색 고요한 향이 찻잔에 피어오른다. 고요한 가을의 정취가 가슴 가득 밀려온다. 여행을 떠나온 듯 설레는 마음이다. 말갛게 우려낸 차를 마신다. 따스함이 온 몸을 돌아 손끝에 머문다. 남아있던 마음의 분주함이 사라진다.

가만히 호흡에 집중한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지워버리자. 마음을 비우는 것이야말로 침잠에 이르는 길이다. 마음의 침묵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워진 마음을 다독이며 고요함으로 가슴에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비워진 마음은 침묵 안에서 마침내 오롯이 나 자신을 마주하게 한다.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처럼 순수한 자신으로 돌아가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나'를 만나는 것이다.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찾는 것이다. 바쁜 일상 중에서도 뜻있는 일에 몰두하고, 잠깐의 시간이라도 내어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일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한 잔의 차를 우려내고, 다관에 담긴 찻물을 작은 찻잔에 따르는 그 길지 않는 시간조차 즐기지 못했다. 얼마나 내달리기만 하였던가.

비워진 찻잔에 더 깊이 우려낸 낙엽차를 따라 천천히 마신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따뜻함은 가슴으로 이어진다. 내 안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몸을 숨기던 이기적인 욕심이 한동안은 깨어나지 못할 모양새로 내려앉는다. 웅크리고 있던 가슴이 낙엽차 한잔으로 반쯤은 벙글어진다. 가끔은 조금이라도 열린 가슴으로 살고자 했던 선물인가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만큼이나 맑게 갠 마음. 다관에 담긴 마지막 찻물을 찻잔에 따른다. 쪼르르~ 5센티미터의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귀를 기울여보자. 내 마음의 소리도, 낙엽차의 빛깔도, 차를 따르는 소리도 모두 투명하고 맑기만 하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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