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광 칼럼위원
김미광 칼럼위원

작년 겨울에 농약 파는 가게를 지나다가 봄에 뿌릴 비료를 한 포 샀다. 봄이 오면 영양분 말라비틀어진 우리 마당에도 뿌리고 미니사과나무와 뽕나무에도 뿌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난주, 왠지 봄이 성큼 온 것 같아 꽃밭에 영양분이라도 보충해 주어야겠다 싶어 작년 겨울 사 놓은 비료를 찾았더니 도무지 어디다 뒀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온 집 안을 정말이지 안방 빼고는 다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내가 사 둔 비료는 없었다. 그래서 든 생각이, ‘내가 그 때 비료를 사서 바로 뿌렸나보다’ 였다. 그래 그랬으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나는 역시 부지런한 인생이라고 자화자찬까지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화분에 물을 주려고 물뿌리개를 찾았는데 글쎄 매일 보는 바구니, 물뿌리개를 두는 그 바구니 안에 비료 봉지가 들어있었다. 황당했다. 그 바구니는 현관 입구에 놓여 있어서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현관 옆이라 최소 하루에 서 너 번은 보는 자리였다. 내 눈도 믿을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찾던 물건이 없자 나는 하지 않은 일까지도 아마도 내가 그랬을지 모른다고 추측하며 내 자신을 속이기까지 했다. 이것이 바로 ‘익숙한 것의 횡포’다.

너무도 그 장면이나 상황이 익숙해서 매일 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너무도 익숙해서 매일 보면서도 뭐가 잘못되어 있는지 모르는 것, 진정 내 입에 익숙한 음식이라 남들 입맛에는 짜거나 달아도 나는 짠지 단지 모르는 것, 세상 사람들은 다 악당이라고 손가락질 하는데 내게는 익숙한 사람이고 매일 봐 온 행동이라 별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나는 늘 익숙하고 올바른 논리라고 생각하는데 알고 보면 편파적이고 지역감정이나 국가감정을 부추기는 논리인 것 등 익숙한 것의 횡포는 다양하게 숨어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양한 종류의 익숙한 것들의 횡포를 경험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횡포 자체를 못 느낀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오랫동안 익숙한 것에는 일종의 정서적 유대감이 잡고 있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감성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눈이 가려지고 마음이 가려져서 진실을 보지 못한다. 내가 가진 익숙한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돌이키려면 진실이 드러나는 상당한 충격적인 사건이나, 혹은 그 개인 자신이 민감하고 예리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생 익숙한 감정이나 사상, 혹은 늘 먹던 음식이 맛있다고, 늘 보던 사람이 옳다고 믿는 익숙한 것들의 횡포를 겪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사람은 다면체라고 생각한다. 우리 속에 무수히 많은 다양한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한 가지가 잘못되었다고 전부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가진 생각이나 내가 하는 행동이 전부 다 옳지도, 또 전부 다 틀리지도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잘못 알고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예리하게 관찰하고 잘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또한 익숙한 내 감정의 횡포일 수도 있다.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선거전에서 양대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얘기와 인터넷에 떠도는 뉴스를 보면서 익숙한 것의 횡포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보였다. 상대방의 얘기도 한번쯤 들어봄직도 하건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생각 혹은 이념이 올바르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내가 지지하는 후보는 무조건 옳고 상대 후보는 무조건 틀리다는 극단적 논리로 접근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미 익숙한 것의 횡포에 사로 잡혀 진실을 보는 눈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강한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어서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맹목적, 습관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를 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방향은 어디인지 모르겠다.

익숙한 것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은, 잠시 서서 한 걸음 늦추어 다른 방향 혹은 다른 사람의 시야가 되어 사람이나 사물이나 현상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번쯤 내 생각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들어보고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 것만 바르고 맞다 고집하고 주장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시야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익숙한 것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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