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실학자 이수광((李   光 1563~1628)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그의 아버지 이희검(李希儉)은 병조판서를 지낸 집안이다. 그러나 살았던 집은 비가 샐 정도로 낡고 허술했다. 비우당(庇雨堂)이란 당호의 이 집은 지금도 서울 동대문 가까운 낙산공원 옆에 옛터가 보존되어 있다.

선생은 여기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하셨다. 비우당은 본디 조선 태조 때부터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4대 35년간 정승을 지낸 유관(柳寬)이 살던 집이다.

공은 황희, 맹사성과 함께 선초삼청(鮮初三淸:조선 초기 세 명의 청백리)으로 장마가 들어 지붕에서 비가 새자 방안에서 우산을 펴들고 부인에게 '이런 날 우산도 없는 집은 어떻게 하지'하며 걱정했다는 일화가 용재총화(    齋叢話)에 기록되어 있다.

이 집을 이희검이 유관의 인격과 청빈생활을 흠모하여 살게 되었다. 비우당이라는 당호는 '옷이란 몸을 가리면 되고(의족이폐신:衣足以蔽身), 밥이란 배만 채우면 되고(식족이충장:食足以充腸) 집이란 비만 가리면 된다(가족이비우:家足以庇雨)'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거제에서 대성(大姓)을 이루고 있는 칠원(漆原) 윤공(尹公) 집안의 석보(石輔)가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그의 처 박씨는 사는 게 궁색하여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몇 가지 물건을 팔아 밭 한 뙤기를 장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석보는 "내가 관직에 있어 녹을 받거늘 어찌 농부의 몫인 땅을 가질 수 있으며, 전에 없던 밭을 장만했다 하면 세상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어서 물리시오"하며 꾸짖어 되돌린 일이 있다. 석보는 청백리(淸白吏)로 녹선(祿選)되셨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청렴은 관리의 본분이요, 갖가지 선행의 원천이자 모든 덕행의 근본이니 청렴하지 않고서는 목민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부끄럽게도 민선자치시대 이후 거제시장 출신 3명이 모두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를 보면서 거제시민의 실망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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