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봉건사회에서의 여자는 충(忠)· 효(孝)· 절(節)이라는 문화 속에서 희생당하기를 강요받으며 살아야 했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가정이라는 대문 안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가사와 육아는 물론이고 농사일도 여자 몫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밤이면 길쌈과 바느질까지 조선시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가 되어 참고 살아야만 했다.

여자에 비하면 남자들에게는 좋은 세상이었다. 7월 보름날만 해도 농사일에 힘들었다는 핑계로 호미 씻어 걸어두고, 한 일년 키워온 개 잡아 장국으로 포식하고, 더러는 백중(百中) 난장의 객주집을 드나들고, 동네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은 씨름판을 기웃거리는 백중은 그야말로 '남자의 날'이었다.

그래도 염치는 있어 남자들은 한 달 후의 한가위를 여자들에게 시간과 여유를 대폭 양보한다. 백중 다음날부터 한가위 전날까지 마을마다 길쌈한 것을 가져와 시합을 해서 진 마을이 음식을 대접하는 행사가 있었다. 본래 이 풍습은 삼국사기에 보면 '적마경기(績麻競技)'라고 해서 신라 제3대 유리왕 때부터 있었다.

한가위는 바로 이 길쌈놀이의 유습(遺習)이다. 곧, 여성사회의 축제에서 한가위가 시작되었다.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술과 음식이다. 그래서 한가위는 더욱 즐거웠다. '더도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하소서'라는 바람은 남자의 희망이 아니고 여자들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평소에는 엄격히 제한되었던 여자들의 외출도 한가위 때만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저녁에는 오광대나 탈춤구경을 하려 마실 나가는 일도 허락되었다.

여자가 한 번 시집오면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봉사 삼년이라는 가혹한 시집살이로 친정조차 쉽게 갈 수 없었지만, 한가위 때만은 '반보기'라는 중로상봉(中路相逢)을 통해 친정 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한가위만 되면 '남편은 한가하고 아내는 가위눌리는 날'이라고 여자들의 불만이 대단하다. 본래 한가위는 여자 중심의 날이었음을 남자들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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