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국가유공자 거제시지회 최종겸 사무국장

피로 물든 강, 그야말로 '아비규환' 285명 중 3명 생존
배운 건 '전쟁의 기술' 뿐…"전사자 희생 기억해줬으면"

"다시는 반복 되선 안 될 동족상잔의 비극, 후손들에게 물려주진 않을 거라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0분. 새벽의 평화를 깨뜨리며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은 '폭풍'. 피의 폭풍이 한반도 전역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군과 유엔군 전사자 40만명. 북한군 전사자 142만명. 민간인 사상자 250만명이 희생됐고 240만명의 피난민과 전쟁고아 10만명, 1000만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남한의 농토 25%가 손실됐으며 산업기지 90% 이상이 파괴됐다.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참사 6.25 전쟁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전쟁….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요.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세월, 물어보니 그저 모진 기억만 떠오릅니다.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끔찍한 동족상잔의 전쟁…. 그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6·25는 우리 후손들은 절대로 겪지 말아야 할 비극적인 민족의 역사라오."

지난 8일 6ㆍ25 참전용사 사무실에서 만난 최종겸(83ㆍ6·25 참전국가유공자 거제시지회 사무국장)씨. 그의 나이 23살이 되던 해 6·25 전쟁이 일어났다. 고향인 칠천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던 최씨는 1950년 8월 어느 날 아침,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강제 징집을 당한다.

▲ 사진 왼쪽부터 6·25 참전국가유공자 거제시지회 최종겸 사무국장,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김세용 사무장·전성업 지회장.

그렇게 전쟁터로 간 최씨는 2사단 31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에 소속돼 강원도 철원에서 삼각지 전투를 치르게 된다. 285명 중 단 3명만이 살아남았다. 최씨가 바로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전쟁터는 그야말로 아비규한. 가만히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손을 붙들었던 전우가 순식간에 시체가 됐다. 시신 위에서 잠을 자고 동료의 주검을 밟고 전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한밤 중에 강물을 떠마셨는데 다음날 아침 보니 강물은 온통 북한군의 핏물이었다. 견디기 힘든 모진 시간이었다.

"잔인한 일이지만 차라리 그 자리에서 바로 죽는 전우들을 보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팔다리가 잘린 채로 붙들며 '나 좀 살려줘' 절규하던 목소리는 팔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 저를 귀롭히지요. 전쟁….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깊은 상처만 남기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겁니다."

1953년. 휴전이 되었다. 최씨는 69년 7월 30일 소위로 예편하게 된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쳤지만 남은 건 없었다. 지친 몸과 모진 기억이 전부였던 최씨는 '고향에 살아돌아왔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땅이라도 있으면 농사라도 짓겠고 기술이 있으면 기술자라도 되겠지만 최씨가 가진 '전쟁터에서 싸우는 기술' 같은 건 사회에 나와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결국 최씨는 옛 동료들을 찾아간다. 69사단의 훈련소를 만든 사람이 바로 최종겸씨였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으로 하청면 예비군 중대장을 맡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군대란 인생의 전부였고 국가란 애국심의 다른 말이었다.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후손들이 아픈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한민족끼리 총칼을 빼어들고 싸워야 했던 비극적 전쟁, 6·25….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현재 거제에 생존해 있는 6.25 참전용사는 약 2000여명이다. 그들 중 일부는 불구가 되었고 어느 누군가는 '무공훈장' 하나 없이 생을 마감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단지 하나,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기억해 주는 것이었다.

6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당시를 살아낸 많은 사람들이 생존해 있다.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국가, 한반도. 여전히 우리는 휴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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