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칠 화평교회 담임목사

바야흐로 봄이 왔다.

굳었던 대지에 봄기운이 만연하면서 땅은 새싹을 내고 나뭇가지 끝에 걸린 새순들은 처음 보는 새 세계가 신기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재잘거릴 때, 어떤 이는 말한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왜냐고 물으니 새싹을 내는 가지와 내지 못하는 가지가 확연히 구분이 되는 달이기 때문이란다. 이전까지만 해도 똑같이 말라 있었는데 이젠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속일 수 없게 되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버림받는 것 같으니까 잔인한 달이란다.

어디 그것만이 잔인한 것이겠는가? 사랑니의 고통을 아는가? 사랑니는 스무살 정도면 난다. 그런데 이것이 뚫고 올라올 때는 잇몸에 염증이 생기고 그 보이지 않은 염증 때문에 고통이 있게 되는데 그것을 사랑니 통이라고 한다. 이미 굳어진 살갗을 새 이빨이 뚫고 올라옴으로써 생기는 통증 말이다.

4월이면 새순이 나지만 그 새순을 내어주기 위해선 가지 끝마다 이 고통이 있게 될 것이니 4월은 또 하나의 잔인함을 느끼는 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잔인한 달 중순엔 또 하나의 아픔이 있었으니 바로 4.19이다. 50년 전 잘못된 위정자들을 대항하여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먼저 일어난 이 사건은 이내 부산에서 서울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번져 부통령의 일가를 자살에 이르게 했고 급기야는 대통령의 하야까지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기에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위대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나무위에 달릴 때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무덤에서 나올 때 하는 찬송이 있다.

이 찬송을 부르노라면 "거기 너 있었는가" 란 말이 "그 때에 넌 무엇을 하고 있었더냐"고 묻는 것 같은 추궁에 못 이겨 눈물을 빼내게 하는 찬송이 바로 "거기 너 있었는가"란 찬송이다.

이번 4.19를 지나면서도 그때에 교회는 무엇을 하였고, 지금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과연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부패정권 물러가라고 외칠 때 교회는 무엇을 했으며, 지금 이 정부에 대해서 미친소 물러가라고 거리로 나설 때 또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우리는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교회는 어디에 서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4.19 당시 6.25 당시,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일제 식민지하에서 교회는 무엇을 했던가? 그때의 사회는 폭압 무법 잔인 무자비 그 자체였다.

그래서 성경 앞에 엎드려 본다.

바로의 압제에 모세는 어떤 모습이었으며, 아합의 폭정에 엘리야는 또 어떠했던가? 경에 의하면 그들은 군사를 모집하지 않았고 그들은 촛불을 든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무릎으로 시위했으며,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는 황량하다는 뜻의 호렙산을 하나님의 산이라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 씨름하였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응답까지 받아내는 쾌거를 이룬 사람들이었지 않은가?

무릎보다 앞서는 것이 없어야 한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무릎 꿇고 기도하여 답을 얻어내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지 않은가? 너, 나, 우리의 살길은 오직 하나님께 있으니 그 하나님께 묻는 지혜가 오늘에도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