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은 비옥한 넓은 들이 있던 바닷가 마을이었다. 농토와 바다가 있어서 농어업으로 살기 좋았다. 농업과 어업을 위주로 하면서도 농한기를 이용해 대바구니를 엮어서 팔았다.들 좋고 바다에서 나는 수산물이 풍부한 이곳에서 왜 대바구니를 만들어서 팔았을까? 대바구니가 장평의 특산품으로 알려질 만큼 집집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바구니를 만들었다. 매년 한 두 번씩 대바구니 엮는 시합도 했다.이 사진은 1971년 삼성조선소가 들어오기 전이다. 마을 앞 따뜻한 양지쪽에서 정월보름날 보름달처럼 밝고 둥근 대바구니를 엮어서 팔아 복을 받겠다는
1972년 초가을 하청면 신동마을 앞으로 흐르는 작은 도랑물에서 빨래하는 모습이다. 새마을사업으로 만든 빨래터로 산골짜기 물을 한 곳으로 모아서 작은 도랑을 만들었다. 주변에 빨래하기 좋게 돌도 깔아 놨다.빨래터를 만들기 전에는 가까운 냇가로 나가서 빨래를 했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은 빨래하러 가는데 힘들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찬바람에 추워서 빨래하기도 힘들었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돌멩이로 둥그렇게 얼음구멍을 만들어 빨래를 했다. 그럴 때는 옆에서 냄비에 물을 끓여 얼어붙은 손을 더운물에 담갔다 빼고, 또 호호 불면서 뽀얗게
사등면의 부속 섬인 가조도(加助島)는 부산과 통영의 뱃길인 성포항과 마주하고 있는 섬이다. 섬의 생김이 '가자미'처럼 생겼다고 해서 옛 사람들은 '가자미섬'이라고 불렀다.거제도에는 76개의 부속 섬이 있다. 그중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66개고 유인도가 10개다. 그중 가조도는 칠천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가조도 서북단에 우뚝 솟은 옥녀봉은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딸이 죄를 짓고 내려와서 산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그 모습은 고운 여인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파아란 융단위에 앉아 있는 모습처럼 아름답게
장목면 대계마을 김영삼 대통령 생가는 대금산이 닭처럼 동쪽으로 뻗어 내려온 비학 포란형의 명당지다.대계마을은 큰 닭섬이라 하고, 소계마을은 작은 닭섬이라 한다. 김 대통령의 생가 터는 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이 사진은 198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기와지붕 4칸의 본채와 아래채가 ㄱ자 형식으로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농경문화 시대에 4칸짜리 기와집에 살면 꽤나 잘 사는 부잣집이다. 주변에는 슬레이트 집이 있고, 집 앞에는 마을 회관이다. 돌담장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고, 돌벽 사이 돋은 풀에서 생기가 넘친다.이 집에서
장평마을과 고현 서문마을 사이 바닷가에 있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을 '갈오지' '가로지' '갈우지' '서목' '조항'이라고도 했다.'갈오지'란 지명은 장평과 고현의 중간 쯤에 있는 외진마을이란 되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현의 서쪽 장평가는 길목에 있다고 해서 '서목'이라고도 했다. '조항'이란 말은 바닷가에 있지만 항상 바닷물이 말라 있는 항구라 해서 마를 조(燥)·항구 항(港)을 써서 '조항'
1969년 12월18일. 당시 이한순 거제군수를 모시고 장승포와 일운 지세포로 출장을 갔다오면서 찍은 사진이다.이곳은 일운면 구조라해수욕장 북쪽 북병산 산복도로 변에 있는 묘지 주변이다.마을 여인들이 땔감으로 장작을 해 오면서 쉬고 있다. 나무하러 나온 할머니를 따라온 어린 학생들이 묘지 옆 잔디밭에서 씨름을 하고 있다.학생들과 할머니는 씨름하는 광경을 쳐다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할머니 한 분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다. 그때 그 시절은 먹고 살기가 팍팍하고 힘들어서 아무리 좋은 구경도 즐겁지 않았다.이 사진 한
1970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던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먹고 살기 어려워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고, 온갖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결혼 연령도 20대가 적령기이기 때문에 일찍 결혼해 아이를 많이 낳았다. 아파도 병원비 걱정과 병원이 없어서 치료하기 힘들었다.장승포·거제·사등·장목에 개인병원이 있었고, 거제백병원이 들어오기 전까지 고현에서는 보건소가 병원역할을 했으며, 부산약방이 있었다.그럴 때 어린이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
1970년도에는 거제군청에 각 읍면을 담당하는 실과가 있었다. 거제면은 재무과, 장승포읍은 내무과, 둔덕면은 공보실, 동부면은 보건소에서 각각 담당했다.1970년 9월11일. 박희수 거제군수가 부임해 읍면 순시를 나섰다. 이 날은 동부면을 순시하는 날이다. 그 당시는 읍면 지역에 점심을 먹을 만한 음식점이 없었다. 대부분 막걸리와 안주를 파는 주막집 같은 술집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서 막걸리 한두 잔으로 점심을 때웠다.군수가 지역을 방문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점심 대접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군수 일행이 대접을 받을 수도
둔덕면 옥동마을에서 상촌의 점촌마을 앞 도로. 이 도로는 1969년 9월14일 태풍 '엘시'로 폭우가 쏟아져 유실됐다. 도로가 다 쓸려내려가면서 강바닥으로 변했다.상서마을 주민들이 새마을기를 꽃아 놓고 삽과 곡괭이로 도로복구를 하고 있다. 이때도 젊은 사람들은 직장을 구해서 나가고 대부분 50대부터 70대의 노인들이 복구작업에 나섰다.당시에는 둔덕으로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차가 겨우 한 대 다닐 정도의 자갈길은 군용트럭이 가끔 산방산의 장작을 실어다가 견내량을 통해 부산·마산 등지로 팔 때다.필자 역시
어떤 촌양반이 한양에 갔더니 진기한 물건을 파는 데가 많았다. 촌에서는 보고 듣지도 못했던 물건들이라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저것 살피던 중에 거울을 보았다. 처음에는 웬 낯선 사람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사람을 이 안에 넣어서 파는 법이 어디 있소?"하고 따졌다. 상점주인은 촌양반을 놀려 줄 생각으로
거제땅에 성지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성지를 절에 보내 중이 되게 했다. 성지는 도통한 스승을 만나 풍수지리에 통달하여 성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이 났다. 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성지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집으로 왔다. 자식이라고는 오로지 성지스님 혼자뿐인지라 앞으로 어머니의 제
옛날 옛적에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이 계셨다. 임금님 주변에는 이야기꾼들이 많았지만 자꾸만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임금님, 이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이야기꾼들은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신하들은 임금님이 이야기에만 빠져 나라 다스리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늘 걱정이었다. 그래도 임금님은
누구든지 돼지꿈은 행운을 가져다주는 좋은 꿈으로 여긴다. 실제 꿈을 해석할 때도 돼지는 행운·복·재물·명예를 상징하는 매개물로 여긴다. 돼지꿈이 재물과 연관이 되는 것은 '돼지 돈(豚)'자와 화폐로서의 '돈'이 같은 발음이기 때문이다.옛날에 어떤 젊은이가 하룻밤에 세 번이나 돼지꿈을 꾸었다. 남들은 꾸고 싶어도
1970년대 거제도는 육지교통보다 해상교통으로 생활했다. 항구에서 배를 타고 이웃으로 다녔고 부산, 마산, 진해, 통영은 정기여객선이 하루에 한두 번 다녔다. 바람이 불고 태풍이 일어나면 배가 다닐 수 없어서 섬에 갇혀 살았다.이 같은 어려운 고통 속에 살 때 새마을운동이 1970년 4월22일 박정희 대통령의 착안으로 시작됐다. '우리 마을을 우리 힘으로
둔덕면 점골에 있는 두 개의 바위는 두드리면 무당이 굿을 할 때 내는 소리처럼 하나는 장구소리, 하나는 징소리와 비슷하다 해서 무당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이 무당바위가 있는 아랫마을에 참새 한 마리가 물통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 때 시집 온지 며칠 안 되는 박영감네 며느리가 그 참새를 건져내어 살려 주었다. 참새는 오들오들 떨면서 "새각시
어떤 총각이 나이가 차 장가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여러 사람과 함께 혼인하러 가는 중에 난리가 일어났다. 신랑은 함께 가던 아버지와 친지 그리고 친구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 피난 갈 준비를 하게하고는 혼자서 예장(禮狀)을 가지고 신부집으로 갔다.이 난리통에 신부집인들 무사할리 없었다. 신부가 사는 마을에 들어서자 온 동네가 텅텅 비어 있었다. 신랑은 신
옛날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살았다.형은 살기가 넉넉했지만 동생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형제는 남달리 우애가 깊었다. 하루는 동생이 강둑에서 밭을 일구고 있는데 강 가운데서 난데없이 큰 잉어 한 마리가 펄쩍 뛰어 오르더니 동생이 일하고 있는 밭 옆에 떨어졌다.동생은 일을 멈추고 잉어를 집어 들었다. 가난한 살림이라 그 잉어를 장에 내다 팔면 며칠은 먹을
옛날 어떤 마을에 두 형제가 살았다.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형제는 부모님이 남긴 재산을 많이 차지하려고 싸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해도 해결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형제는 고을의 원님을 찾아가 판결을 부탁했다. 고을 원님은 두 형제의 주장을 듣고 나더니 종이에 '산함일구 강토이주(山含一臼 江吐二珠)'라는 글을 썼다. 뜻을 보자면 '산이 하나의 절구를 머금
어느 마을에 다섯 명의 아들을 뒀지만 딸을 낳지 못한 부자가 있었다. 딸을 낳기 위해 깊은 산중에 들어가 기도를 하던 중에 어떤 대사가 소 발자국에 고인 물을 먹으면 딸을 낳게 될 것이라는 비법을 알려줬다. 부자의 아내는 소발자국에 고인 물을 먹는다는 게 그만 여우 발자국에 고인 물을 마시고 말았다. 그 후 아기를 가졌는데 마침 딸이었다. 딸은 자라 어느덧
무엇이든 판단을 잘해주는 열다섯 살 난 사람이 거제 사등성에 원님으로 부임하여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하루는 가난하게 살아가는 어느 옹기장수가 산 너머 동네에 팔려가는 중이었다. 산마루 쯤 왔을 때 짐이 무겁고 몸도 피곤하여 옹기를 쌓은 지게를 작대기로 받쳐놓고 쉬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난데없는 바람이 휭하니 불어오더니 옹기를 쌓은 지게를 넘어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