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성(城)10】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성'
구조라진성 거제 동쪽바다를 지켜라

거제는 성곽유적의 보고(寶庫)다. 삼한시대 변진 두로국부터 왜와 국경을 마주한 탓에 수천년 동안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거제지역 성곽 유적의 역사 속엔 외적을 막아 나라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다. 특히 거제지역의 성은 시대별·형태별·기능별 등 다양한 성이 존재해 성곽의 박물관으로 불린다. 섬 하나에 성곽 유적이 이만큼 다양하게 많은 곳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본지는 거제지역의 성곽 유적을 통해 선조들이 만들어온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 '거제의 성'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구조라진성은 지세포진과 오아도 사이 거제의 동쪽 바다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진은 드론으로 촬영한 구조라진성.  / 사진= 류정남 사진작가 제공
구조라진성은 지세포진과 오아도 사이 거제의 동쪽 바다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진은 드론으로 촬영한 구조라진성. / 사진= 류정남 사진작가 제공

조라진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문종 원년 물사포(勿士浦·지금의 동부면 학동)에 왜구가 습격할 경우 지세포(知世浦)나 오아포(吾兒浦) 등과 거리가 멀어, 두 포구에서 지원을 받기 어렵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부터다.

이후 조라포에는 지세포의 병선 2척, 오아포 병선 3척, 처치사(處置使) 군관(軍官) 1인을 배치하고 단종 때에는 조라포가 왜선이 닿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만호를 파견하고 당포(唐浦)·오아포·옥포(玉浦)에서 소맹선(小猛船) 각 1척씩을 이속(移屬)시켜 방어를 강화했다.

조라진은 세조대(1457년)에 이르러 제포(진해)에 예속됐다가 2년 뒤인 1459년에 다시 설치하게 된다.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항은 항구 바깥으로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가까워 예전부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한 곳이었고 대마도를 거쳐 대한해협으로 넘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적합한 곳이었다.

일운면 수정산 북서쪽 계곡에 지어진 구조라진성은 계곡과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아 해안에서 바라보면 식별하기 어려운 지형에 지어졌는데 이는 조선 전기에 축조된 수군 관방성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구조라진성에서 유일하게 문루가 없었던 동쪽 성벽은 비교적 큰 돌을 이용해 견고하게 쌓았고 서문지는 거제지역 여러 성 중 유일하게 암문으로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암문은 성의 정문이 아닌 사잇문으로 양식·가축·수레 등을 운반, 배후공격 및 군수품 조달역할을 하는데 주로 성곽의 굴곡진 곳이나 수목이 우거진 곳에 위치한다.

구조라리의 선소는 구조라리 97-11번지 일대로 추정되는데 구조라리 97번지 일대는 예전에는 모래사장이 있던 바닷가였지만 30여년 전에 매립됐다고 한다.

1872년 지방도 지세진지도에 기록된 구조라성.
1872년 지방도 지세진지도에 기록된 구조라성.

조라는 두 곳이지만 진성은 하나

임진왜란을 맞아 조라포도 거제도의 다른 수군진과 마찬가지로 개전 초기부터 진이 비워졌고,  왜군이 후퇴해 경상도 일대에 주둔할 당시엔 점령해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라포진은 이진(移鎭)되는데, 이진된 위치와 시기는 각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구조라에서 지금의 옥포지역으로 이진된 사실은 분명하다.

대동지지에는 선조 25년(1592)에 옥포진성 밖으로 진을 옮기고, 1651년(효종 2)에 다시 지세포의 예전 자리로 옮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영남읍지 등에는 1604년(선조 37)에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새로 이진된 조라진에는 성곽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구조라진성은 임진왜란 이후 진이 옥포 주변으로 이진 이후 거의 사용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조라포진에 소속된 선박과 관원은 군병선 8척과 군사 800명, 무군병선(無軍兵舡) 3척이었다가 조선 후기(옥포 조라진영)인 1894년 영남진지에는 귀선 1척에 177명·병선 1척에 36명·사후선 2척에 10명·각색 군교(各色 軍校) 1436명 등 모두 1659명으로 늘어난다.

성종실록(1490)에는 구조라성이 둘레 1890척·높이 13척으로 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872년 지방지도 지세진지도에서 나타난 구조라성은 동쪽이 트여 있고 치가 7개 그려져 있는데 문지는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에 그려진 조라포남봉관해도에는 동문을 제외한 서남북에 문루가 그려져 있어 구조라진성의 성문은 원래 3개가 설치됐던 것으로 보인다.

구조라진의 내·외부시설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새로 이진한 조라진의 기록은 '1872년 지방지도 조라진지도'에서 찾을 수 있는데 동헌·객사·화약고·사령방·내아·교청·사고·이청·포청·선소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구조라진성은 동벽과 옹성 등 일부 구간이 복원된 상태다.
현재 구조라진성은 동벽과 옹성 등 일부 구간이 복원된 상태다.

조라(助羅)라는 지명이 가진 유래

최근에는 거제의 아름다운 둘레길로 더 유명한 샛바람소리길은 원래 구조라진성으로 가는 길이다,

구조라진 지역의 지형이 자라의 목처럼 생겨 조라목·조랏개·조라포·목섬·목리 또는 항리(項里)라 불렀고 포구의 모양이 조래(밥짓기 전 쌀을 이는 도구) 모양이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조라라는 땅이름을 가진 곳을 전국에서 찾아보면 거제의 구조라와 충남 보령의 조라포라는 작은 포구, 전남 여수의 현 소라면의 원래 지명이 조라로 사용됐다. 조라라는 이름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해안가의 포구가 있던 지역이다.

거제와 보령·여수의 조라지역은 모두 해안선의 모양이 조래 모양의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세 지역의 해안선 특징이 닮아 있고 '조랏개'와 음이 비슷한 해산물을 담는 그물 도구인 '조락'의 특징처럼 입구가 작고 안이 넓은 포구였던 조랏개 면의 옛 치소가 현천마을이나 관기마을로 전해오고 있어 조라포는 지형의 특징 때문에 만들어진 땅이름으로 보인다.

구조라는 조선 성종(成宗)원년(1470년)에 이르러 조라진(助羅鎭)을 두고 만호를 파견했고 임진왜란 후 선조 37년(1604) 옥포진 옆 조라에 옮겼다가 효종 2년(1651)에 다시 되돌려 이때부터 조라 앞에 옛 구(舊)를 붙여 구조라진이라 불렀다.

이후 영조 45년(1769년)에 방리 개편으로 향리방(項里坊)으로 불렸다가 고종 26년(1889) 조라도리(里)와 항도리(里)로 분할 개칭했다. 다시 6년 후 고종 32년(1895)에 칙령(임금이 내린 명령) 제98호로 조라리로 개칭하고 통합했다. 

'조라'라는 지명은 자라목 또는 조래처럼 길목이 좁은 반도의 모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라'라는 지명은 자라목 또는 조래처럼 길목이 좁은 반도의 모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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