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성(城)8】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95호 '다대산성'
거제 속현중 하나인 송변현 및 남수현의 치소성

거제는 성곽유적의 보고(寶庫)다. 삼한시대 변진 두로국부터 왜와 국경을 마주한 탓에 수천년 동안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거제지역 성곽 유적의 역사 속엔 외적을 막아 나라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다. 특히 거제지역의 성은 시대별·형태별·기능별 등 다양한 성이 존재해 성곽의 박물관으로 불린다. 섬 하나에 성곽 유적이 이만큼 다양하게 많은 곳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본지는 거제지역의 성곽 유적을 통해 선조들이 만들어온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 '거제의 성'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거제지역은 신라시대부터 거제를 주현으로 삼고 매진이·거로·송변의 속현이 있었다. 사진은 송변현의 치소성으로 추정되는 다대산성 서쪽 성곽.
거제지역은 신라시대부터 거제를 주현으로 삼고 매진이·거로·송변의 속현이 있었다. 사진은 송변현의 치소성으로 추정되는 다대산성 서쪽 성곽.

거제지역은 신라시대부터 거제를 주현으로 삼고 매진이현(買珍伊縣)·거로현(巨老縣)·송변현(松邊縣) 등 3속현(屬縣)이 존재했다.

최근 옥산성의 발굴 결과 옥산성이 매진이현의 치소성으로 추정되면서 거제현과 속현은 모두 치소성을 쌓았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거제현의 치소지 및 치소성은 둔덕면 거림리 일대와 둔덕 기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거로현의 아주현성지는 겨우 흔적(거제시 아주1로 60)만 남아 있다가 도시개발 이후 흔적조차 확인 할 수 없는 상태다.

송변현은 현재 남부면 일대와 동부면 일부 지역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경덕왕 때 남수(南垂)로 고쳐 불렀다가 고려시대 공도 정책으로 거제도 사람들이 거창으로 이주할 때 함께 옮겨지기도 했다.

조선 세종시기 대마도정벌 이후 거창에 이주했던 거제도 사람들은 다시 거제도로 돌아오게 되는데 송변현 사람들도 이때 거창에서 다시 거제로 돌아오게 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간전(墾田)이 709결(結)이라는 기록으로 미뤄 송변현의 행정구역은 꽤 규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송변현 지역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해 조선시대 지세포(知世浦) 수군만호의 지휘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다대산성은 대한해협과 한산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성을 쌓았다.
다대산성은 대한해협과 한산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성을 쌓았다.

대한해협과 한산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

송변현의 치소성으로 추정되는 다대산성은 남쪽과 서쪽으로 대한해협과 한산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조망권을 가지고 있다. 또 북동쪽에는 가라산 봉수대, 북쪽에는 탑포산성과 율포산성이 가까이 위치한 거제 남부지역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한 곳이다.

특히 인근의 가라산(加羅山) 봉수대는 동부면과 남부면 경계지점에 있는 가라산 정상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한배곶 봉수대·북쪽으로 계룡산 봉수대와 서로 연결돼 있었다고 한다.

문서상 남아있는 기록은 없지만 송변현은 독로국과 가야의 역사와도 연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대산성이 위치한 곳이 가야를 뜻하는 가라산인데다 이 지역이 고대 남해안 뱃길인 거제지역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을 잇는 중요 기착지기 때문이다.

현재 거제도 동쪽지역인 아주(아주고분군)동·장목면 농소(농소 고분)와 거제지역 서부 명진현 관련 유적(귀목정 유물산포지·거제면 귀목정·옥산성), 둔덕면 방하리 고분군 등 가야시대 및 삼국시대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데 비해 유독 송변현과 관련된 고분이나 유적이 없어 앞으로 연구 및 조사가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다대산성 구조도.
다대산성 구조도.

천년을 거슬러가는 송변현의 흔적 

삼한시대부터 국가 또는 세력간의 영토 확장과 영역지배를 위한 전쟁이 생기면서 성곽이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국시대 전후에 쌓은 성곽 축조는 단순히 방어시설이라는 의미를 넘어 정치권력의 등장과 집중이라는 사회적 배경은 물론 당시 성곽이 쌓아진 지역이 토목기술 및 대규모 노동력의 조직이 가능했던 곳이라는 점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따라서 송변현의 치소성으로 추정되는 다대산성이 갖는 의미는 크다. 다대산성은 지난 2012년 (재)동서문물연구원에 의해 기초조사가 진행됐었다.

조사 이전까지만 해도 다대산성의 축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알려졌지만 조사 결과 다대산성이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축성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쌓은 것으로 나타난 다대산성은 그동안 성벽의 둘레가 395m로 알려졌지만, 정밀 측량결과 성벽의 둘레는 이보다 49m 더 긴 444m로 조사되기도 했다.

당시 조사를 통해 다대산성 성내에선 다양한 수습유물도 출토됐는데 모두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유물로 밝혀졌다.

남부면 가라산 중봉 261m의 9부 능선을 따라 테를 두르듯 만든 테뫼식 산성인 다대산성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게 만들어져 남쪽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유리하게 지어졌으며  동북면 중간지점의 내벽에 맞물려 연결된 추정누대의 구조가 특이한 것이 특징이다.

다대산성 내·외부에 채석장 4곳의 흔적이 남아있어 고대 산성의 축조과정 및 기술을 엿볼 수 있다.
다대산성 내·외부에 채석장 4곳의 흔적이 남아있어 고대 산성의 축조과정 및 기술을 엿볼 수 있다.

다대산성 보존과 활용 방안에 대한 고민

다대산성은 남부면 다대마을에서 남문지로 오르는 길과 저구삼거리에서 서문지로 오르는 길, 가라산 봉수 북쪽 능선을 타고 북문지로 오르는 세 가지 길이 있는데 이중 다대마을에서 남문지로 오르는 길이 가장 단시간에 산성을 오를 수 있는 길이다.

다대산성은 고대산성의 산성축조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대산성 내부와 외부에서 발견된 4곳의 채석장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인데 이곳에선 성벽을 쌓기 위해 바위를 깨어낸 흔적을 볼 수 있다.

다대산성의 문지는 현재 남서북 3곳에서 발견되는데 북문지에서 확인되는 개구부는 경남지역 산성에서 잘 확인되지 않는 구조물로 산성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평가다.

다대산성은 문지와 원형석축 집수지·채석장·건물지 등이 고대산성의 제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지난 2018년 10월25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95호에 지정됐다.

하지만 도지정문화재 지정 이후 다대산성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중장기계획은 물론 인근에 위치한 가라산 봉수대와 다대산성과의 연관성 및 학술조사는 여전히 답보 상태다.

더구나 다대산성이 위치한 곳이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역이라 칡넝쿨을 비롯한 나무뿌리 등에 성벽의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또 다대산성 인근에는 수백종이 넘는 다양한 온·난대 식물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이 일대를 자연생태공원으로 활용하는 방안 마련도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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