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동 옥송석(92) 어르신

신문 지면의 인터뷰나 인물 코너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또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 위주로 소개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가장 특별한 사람은 가장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우리 이웃에 삶의 궤적은 어쩌면 위인전보다 가치 있고, 참 지혜가 담긴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거제신문은 평범한 거제 사람들의 빛남을 위해 '밥 한 그릇 주이소'를 시작하게 됐다. '밥 한 그릇 주이소'는 골목길을 가다 마주친 이웃집 아줌마, 담장 너머 사는 앞집 총각, 조선소에 다니는 옆집 아저씨 등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먹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 편집자 주


지난 4일 옥용석 어르신과 최대윤 기자가 어르신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지난 4일 옥용석 어르신과 최대윤 기자가 어르신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지난달 22일 오후 1시께 통영에서 일을 보고 거제대교에서 고현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데 먼저 버스에 탄 20대로 보이는 여성 두 명중 한 명이 카드가 고장 났는지 버스비 계산이 안 되는 기라. 그래서 내가 버스비를 대신 내줬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내릴 때쯤 돼가꼬 고맙게도 내 손에 만원짜리 한 장을 꼭 쥐아 줌서 '할아버지 감사했습니다. 꼭 맛난 거 사드세요'라고 말하고 가삣다. 흔적이 없어…."
"아~ 어르신, 그러면 그 아가씨를 찾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거나 찾고 싶어서 전화하셨어요?"
"그기 아이고…, 요즘 세상에 그런 청년들이 어딨노 이 말이지. 요즘에 신문을 보면 온통 시끄럽고 기분 나쁜 소식 천진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좀 나은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겠나 해서 전화했제."

지난달 26일 거제신문사로 한 통의 제보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어림잡아 70세쯤으로 연상되는 어르신이었고, 최근 자신이 겪은 미담사례를 알리고 싶다는 제보였다.

기자는 갑자기 제보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보통 신문사에 걸려온 제보 대부분이 비리·불합리·사건사고·행정에 대한 비난 등에 대한 제보가 대부분이고 미담사례 제보는 주변 인물이나 관련자로부터 전해 듣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제보자가 92세의 옥송석 어르신이고, 거제에서 나고 자라 한국전쟁에 참여한 국가유공자이며, 지금은 아내와 손자 세 식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르신 전화로 말고, 제가 댁에 가면 밥 한 그릇 주실 수 있습니까?"
"올래? 언제 올낀데? 내가 할매한테 맛난 거 좀 하라고 하까?"
"아입니다. 고마 어르신 드시던 반찬 그대로 냉장고에서 꺼내 같이 먹으면 됩니다. 어르신 평소에 뭐 드시는가 검사 좀 할라고예."
"물끼 없을 낀데…. 알았다. 우리 집이 수월에 ○○교회 가기 전에 어린이집이 하나 있는데 그 삐알이다. 내가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조심해서 오라고."

옥용석 어르신의 여러 감사패와 각종 자료들.
옥용석 어르신의 여러 감사패와 각종 자료들.

어르신 댁의 소박한 밥상

전화통화를 하고 며칠이 지난 뒤 약속한 날짜에 옥송석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을 마을 어귀에서 만났는데 92세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7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특히 돋보기 없이도 한방보감사전의 작은 글을 읽는 것은 물론, 한국전쟁 때 사용하던 군번을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어르신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1931년 일제강점기에 인생을 시작한 어르신은 지금은 볼 수도 갈 수도 없이 마냥 그리워해야만 하는 연초면 이목마을이 고향이다.

어르신은 연초댐이 만들어지기 전에 고향을 떠나 양정동과 수월지역으로 이사를 했지만 지금도 고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 늘 아쉽다고 했다. 연초면 이목마을은 1970년대 말까지 100여 가구가 살았던 제법 큰 마을이었지만 이목댐이 만들어지면서 대부분이 수몰된 지역이다.

어르신은 이목심상소학교에 입학해 16살까지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학급 반장을 역임할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고 학교가 아닌 연초면 명동마을에서 서당을 운영하는 김사범씨에게 땔감을 해주거나 소일거리를 도우며 한학을 배우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어르신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한문을 비롯한 사자성어나 일본어를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민족의 비극이라 불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어르신은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어르신은 훈련소에서 입은 부상으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불편한 곳이 청각이라고 했다.

전쟁 이후에 우리나라 서민들의 일상이 가난과 부족함이었듯이 어르신의 젊은 시절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당시엔 노총각 소리를 들을 20대 중반에서야 중매로 지금의 아내인 연초면 다공마을 정필선(86) 할머니와 결혼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국가유공자 옥용석 어르신.
한국전쟁에 참여한 국가유공자 옥용석 어르신.

"어르신, 할머니 중매로 만났지만 어떤 점이 가장 좋으세요? 60년 넘게 같이 사셨는데 금실은 좋으셨어요?"
"결혼하면 남자는 자고로 여자를 편안하게 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여자는 남자를 존경하고 빛나게 내조해야 하는기라."

어르신의 결혼이야기가 시작될 무렵 할머니가 주방에서 뚝딱 차려낸 점심상을 받았다. 기자는 밥상을 옮기면서 외출 준비에 분주한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결혼하면서 살아온 이야기 해주셔야죠. 어디 가시게요?"
"밥이 좀 진데 우짜노. 차린 게 너무 없어서 미안하네. 나 오늘 눈이 좀 아파서 부산병원에 검사 좀 받고 올라고."

그렇게 할머니는 밥상을 차려주고 서둘러 병원으로 떠났다.

본격적인 밥상 이야기가 시작됐다. 밥상에는 보리가 약간 섞인 할머니표 진밥과 진득한 숭늉·갈치젓갈·물메기알젓갈·파무침·김치가 동서남북에 자리를 잡고 올랐다. 밥상의 메인은 할머니가 직접 담근 갈치젓갈과 물메기알 젓갈이었다. 거제도에선 젓갈의 비린 맛을 잡아주기 위해 제피(초피) 또는 산초가루를 넣는데, 그 향이 은은하게 미각을 자극했다.

그리고 어르신 내외가 직접 집앞 텃밭에서 키워낸 배추와 잔파로 만든 파무침과 김치는 평범하지만 익숙한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졌다.

잠시 후 반찬이 부실하다며 어르신이 가져오신 멸치 한주먹까지 밥상에 오르고서야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어르신은 젊은 사람은 많이 먹어야 힘을 쓴다며 자신의 밥그릇에서 밥 두 숟갈을 떠 기자의 밥그릇에 올려놓고, 나머지는 숭늉에 말아 한 숟갈씩 입으로 가져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느그 경주 최 부자 이야기 아나?

어르신은 지금 거주하는 집으로 이사 온지 20년쯤 됐다고 한다. 나머지 30여년은 현재 거제시보건소 맞은편에 위치한 온천터에서 살았다는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의 90년 세월은 집안 곳곳에서 묻어났다. 방 한쪽 편에는 각종 감사패와 임명장·표창장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쌓여있고, 아랫목 여기저기에는 두 어르신이 복용하고 있는 약병이 줄을 지어 차지하고 있었다.

어르신은 지금이야 뒷방 늙은이 신세지만 20여년 전에는 동네 이장을 도맡아 했고, 각종 주민사업에 참여하는 등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전후 거제의 일상부터 수월에 있었던 포로수용소 당시 상황과 김영삼 대통령과의 친분, 이장 활동 당시 다양한 공적에 대한 자랑으로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기자에게 질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관심이 많은 어르신은 이야기 중간 거제시장이 시정을 잘 살피고 있는지, 거제의 각종 현안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기자와 인터뷰이가 뒤바뀐 순간이었다.

어르신은 거제는 지역균등 발전 없이는 미래가 없고, 대학병원급 종합병원이 없으면 인구감소만 있고 증가는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또 자신만의 건강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아끼지 않았다. 어르신의 건강비법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적당히 걷거나 소일거리를 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이가 들고 아프다고 방에만 누워 있으면 안 아픈 곳도 아프게 된다는 것이다. 또 나이가 들수록 화를 참고 용심(用心)과 남들에게 베푸는 편안함 마음이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어르신은 '경주 최 부자의 가훈'을 거제시민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경주 최 부자의 가훈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모두 담겨있다는 이유에서다. 

"나는 경주 최씨가 아니지만 경주 최 부자가 200년 동안 만석꾼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욕심을 버리고 이웃을 살피며 양보하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지만 어려운 이웃을 살피고 돕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