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성(城)①】 조선의 마지막 산성 '중금산성'
1875년 백성 주도로 쌓은 조선시대 마지막 산성
안 오른 사람은 있어도 한번 오른 사람은 없는 '절경'

거제는 성곽유적의 보고(寶庫)다. 삼한시대 변진 두로국부터 왜와 국경을 마주한 탓에 수천년 동안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거제지역 성곽 유적의 역사 속엔 외적을 막아 나라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특히 거제지역의 성은 시대별·형태별·기능별 등 다양한 성이 존재해 성곽의 박물관으로 불린다. 섬 하나에 성곽 유적이 이만큼 다양하게 많은 곳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본지는 거제지역의 성곽 유적을 통해 선조들이 만들어온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 '거제의 성'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적의 침입을 관찰하기에 좋은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중금산성.
적의 침입을 관찰하기에 좋은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중금산성.

몇년 전까지 역사자료 상으로 조선 시대 가장 늦은 시기, 즉 조선이 마지막 쌓은 성은 거제면에 위치한 '옥산성'이었지만 최근 정밀조사 결과 처음으로 성을 쌓은 시기가 삼국시대까지 올라가며 '조선의 마지막 산성'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놔야 했다.

하지만 조선 시대 마지막으로 쌓은 산성을 보유한 곳은 여전히 거제다. 비공식 기록이긴 하지만 장목면에 위치한 중금산성(中錦山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제군지에 따르면 중금산성은 옥산성보다 2년이나 늦은 시기인 고종 12년(1875년)에 만들어졌다.

중금산성이 만들어진 배경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드문 경우다. 외세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성곽은 적잖은 인력과 자금이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나라 차원에서도 쉽게 쌓지는 않았고 지위가 높은 세력가들도 군사시설을 만드는 행위자체가 반역으로 간주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ㄱ' 모양의 옹성.
'ㄱ' 모양의 옹성.

 

중금산성은 관(官)의 주도가 아닌 백성(民) 스스로 만들어낸 방어시설이다. 거제군지에 따르면 중금산성은 고종 12년(1875년)에 주민 강석원(姜錫元), 정춘식(鄭春植), 김정헌(金正憲) 등 세 사람이 장목면 시방, 율천, 대금 마을주민을 동원해 식량을 저장하고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역사서에 정식 기록이 없는 중금산성은 성곽의 규모나 역사적 배경, 학술적 가치 등으로만 보면 거제지역의 다른 성곽유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내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친숙하고 특별할 수 있는 거제의 보물이다.

중금산성을 쌓을 당시 거제부사는 김학희(金鶴喜)였다. 옥산금성을 쌓은 전(前) 거제부사 송희승이 삼척영장(三陟營將)으로 임명됐다가 옥산금성 축성으로 백성에게 부담을 주고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는 죄로 파직돼 유배를 갔던 시기다.

또 1875년은 강화도조약의 시발점이 된 운요호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하기 위해 측량을 핑계로 군함 운요호를 보내 강화도와 한강 일대에 포격을 가하고 살육, 방화,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다. 훗날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강요해 그 이듬해 불평등 조약인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게 된다.

중금산성 견취도.
중금산성 견취도.

중금산성이 지어진 1875년은 앞서 일어난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의 경험으로 외세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시기였다. 따라서 근대로 접어든 당시에 성을 축성한다는 것이 무지하고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보면 중금산성은 거제도 북단 해안에 위치해 부산항과 대마도 및 대한해협을 경계해 일본 방향에서 침입하는 왜적을 관찰하기에 좋은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 잡았다. 중금산성 북쪽으로는 오래전부터 군사요충지였던 장목진과 구율포성이 자리해 있기도 하다.

대금산 중봉 정상 285m 부분에 테를 두른 듯 축성한 테뫼식 산성으로 만들어진 중금산성은 평면 타원형으로 남쪽과 북쪽 성내는 'ㄱ'자 모양의 옹성(甕城)문지를 가지고 있다. 성의 상단 부분은 성내부 지면에 맞춰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지금은 일부가 훼손된 상태다. 특히 옥산금성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ㄱ'자 모양의 옹성(甕城)문지는 적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는 남쪽과 북쪽에 방어기능을 높이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중금산성의 석축 방식은 같은 시기에 보수한 옥산금성과 비슷하지만 규모나 짜임새 면에서는 허술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관의 주도가 없이 백성들만의 힘으로만 쌓았기 때문에 규모나 기술력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식량 저장고를 만들었다는 기록 등으로 미뤄 중금산성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북쪽 옹성 남서쪽에 건물지의 흔적이 어렴풋 남아 있다.

중금산성에서 바라본 장목 앞바다와 거가대교.
중금산성에서 바라본 장목 앞바다와 거가대교.

또 중금산성 중간 부분에 위치한 언덕은 성 인근에서 키우던 말 무덤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지난해 5월 장목면은 중금산성으로 가는 탐방로 및 주변 잡목 등을 제거해 가깝게는 이수도와 매미성을, 멀게는 부산과 거가대교를 관망하기 좋은 것으로 꾸며놨다.

중금산성에는 지난해 중금산성을 단장하고 만들어 놓은 안내문이 눈에 띈다. 장목면 사람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 안내문에는 중금산성의 간략한 소개와 함께 60~80년대 인근 학교 학생들이 소풀을 먹이고 소풍을 자주 다녔던 곳으로 추억을 되새기고 있다.

중금산성은 외침을 우려한 거제 섬사람들이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장소라는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거제 섬사람들에게 사랑받아야 할 장소다. 하지만 앞으로 중금산성은 섬사람 보다는 섬을 찾아 오는 탐방객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중금산성 아래 위치한 매미성과 이수도가 거제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성장하고 있기도 하지만 중금산성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발길을 끄는 매력이 있어서다.

중금산성 안내판.
중금산성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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