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누군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바람·폭우·추위·배고픔으로 보호받고 병으로부터 안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세상 편안한 일이다.

애완동물은 사람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대신 복종과 반려의 즐거움을 인간에게 준다.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는 자식은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으로 위안이 된다. 보호라는 의미 안에는 함께 살면서 서로 보살피고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며 온갖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 널리 포함돼 있다. 대부분 집과 지역의 동일 공간 속에서 함께 삶을 이어가면서 관계되는 것이 보호다.

그런데 바다·새들·식물·하늘·바람·야생동물처럼 같은 공간에 항상 머물지는 않지만, 사람과의 필수적인 관계 때문에 보호라는 말을 붙이기도 한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희귀하거나 멸종단계인 새들이나 나무·식물·동물들을 보호종으로 명명해 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먹이사슬이나 세월 때문에 자연적으로 멸종돼가는 종도 있지만, 대부분은 환경오염이 원인이다. 그래서 환경오염의 주범인 인간이 주체가 돼 보호한다는 말이 맞는 말인가 의문이 든다. 자연적인 도태나 멸종은 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인류로부터 위협을 받거나 인간이 만들어낸 오염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종들을 보호한다는 말은 고쳐져야 한다.

보호한다는 것은 보호받는 개체보다 힘이 세거나 보호할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자연을 보호한다는 것이 마땅한 말인가? 감히 엄두도 못낼 능력 밖인 인간의 큰 착각과 오만이다. 인류가 탄생하기 세월 이전에도 자연은 존재했을 것이며, 이 세상 최종의 종도 결국은 자연일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겨보면 오히려 인간이 '자연'에서 보호받아 왔고, 앞으로도 자연의 보호 없이는 인간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연보호'라는 말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아 왔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보다 힘이 약해서 보호받아 마땅한 종이라고 인식되지는 않았을까. 자연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방임과 공격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자연보호 인식 정도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보호를 받는 아들이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애완동물이 주인에게 화를 내지 않듯이 사람이 과연 '자연'에게 함부로 할 존재가 되느냐 말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가당찮다. '자연보호'라는 말은 '자연존중'으로 바꿔야 한다. 원래부터 있었던 '자연존중' 다음에 자연의 '인간 보호'를 기다리는 것이 순리다.

지구의 정복자 인간이 지구의 운명을 판가름할 능력과 힘을 갖게 돼 인간과 자연의 파괴되는 모습을 통해 이 시대가 결국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현재 지구의 세대를 '인간의 시대' 즉 '인류세'라 부르고 점점 파괴되는 인간의 미래를 담은 내용이었는데 두려웠다.

현재의 지질시대는 신생대 제4기 홀로세지만 인류에 의해 지구가 짧은 시간 동안 멍들고 급격하게 변했기 때문에 홀로세와 구별되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인류세로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자연이 품을 수 없고 보호할 가치를 가지지 못한 인간이라면 처참하게 부서져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지금도 점점 부서져가는 지구의 속도를 늦추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이르면 아득하다.

적당히 떨어져 있는 나무가 푸릇하다. 인간과 자연도 그러하고 사람 사이도 그렇다. 감염병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되는 요즘 그동안 몰랐던 사람에게서 신비감과 긴장감이 느껴진다. 서로의 모습에 익숙해지기보다 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싱그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자연과 사람이었으면 한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인간임은 변할 수 없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