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시청 씨름단 이다현 천하장사
여자씨름 최초 전관왕 차지…소녀장사에서 여제(女帝)로

지난 2009년 여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열린 찾아가는 씨름대회. 한 여고생이 힘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자갈치 시장 아줌마들을 모래판에 눕히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 상대는 여고생에 비해 왜소한 체격의 여대생으로 결승전을 지켜보는 시장사람 중 여고생의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결승전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싱겁게 여대생의 승리로 끝났다. 승부에 진 여고생은 왠지 모를 서러움에 한참을 펑펑 울었고 당시 여자씨름의 간판스타였던 임수정 장사는 여고생의 어깨를 한참이나 토닥이며 달랬다.

이날 결승에서 쓰디쓴 패배를 경험한 여고생은 11년 뒤 여자씨름 최초로 전관왕을 차지하며 새로운 '씨름의 여제'가 됐다.

거제시청 씨름단 이다현 장사가 씨름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그날의 이야기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승을 차지한 여대생은 여자대학부 씨름 선수였다. 당시 이 장사는 우승 상금(5만원)으로 가족 회식을 할 생각으로 출전해 생애 첫 패배를 맛보면서 몇 개월 뒤 아버지의 후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모래판(씨름)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올해 이 장사의 활약은 그야말로 찬란하다. 지금까지 거제시청 소속으로 이만큼 성적을 낸 스포츠 선수도 없었지만 여자씨름 역사에 길이 빛날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위더스제약 2020 천하장사 씨름대축제' 무궁화장사 결정전에서 이 장사는 김다영(구례군청) 선수를 2-0으로 꺾고 올 시즌 6번째 장사와 전관왕의 업적을 세웠다. 이 장사의 전관왕 달성 소식은 조선경기불황과 코로나19에 지친 거제시민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본지는 지난 14일 최근 여자씨름 출범 이후 최초로 전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거제시청 씨름단 이 장사와 가족을 만났다.

"그동안 게으르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 온 결과의 보상인 듯해 너무 좋습니다."

손톱은 알록달록한 네일아트로 꾸몄지만 샅바를 잡는 손바닥은 온통 굳은살 투성이인 이 장사는 여자씨름 최초로 전관왕을 달성한 소감에 대해 묻자 고생한 만큼 좋은 성적을 내 기쁘다고 했다.

이번 전관왕 달성으로 이 장사도 각종 언론에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이 장사만큼 주목을 받은 사람이 이 장사의 아버지 이대우씨다.

이 씨는 80년대 럭키금성씨름단 소속으로 83년 3월8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라장사 결승전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이만기 장사와 샅바를 마주 잡았던 씨름 스타였다.

이 장사는 씨름을 막 시작할 무렵인 10년 전 한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아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서 집안 장식장을 황소로 가득 채울 것"이라고 아버지와 약속했었다. 지금까지 성적으로만 보면 아버지와 약속은 충분히 지킨 셈이다.

씨름에서 '장사'라는 호칭은 장사를 차지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 장사 타이틀이 없는 사람은 '선수'로만 부른다. 그래서 현역시절 잦은 부상 탓에 장사 타이틀 없이 아쉽게 은퇴를 선택했던 이 씨에게 이 장사는 '꿈을 이루게 해준 고마운 딸'이다.

이 씨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제에 등재된 씨름이 예전의 인기를 되찾고 이 장사가 세계를 무대로 우리나라의 씨름을 알리는 전도사가 되길 바라고 있다.

반면 이 장사에게 아버지는 장사 이다현을 만든 은인이자 대표기술인 '들배기지'를 전수한 스승이기도 하다.

그동안 여자씨름의 대명사는 임수정 선수(콜핑)였다면, 올해부터는 이 장사를 여자씨름의 대명사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올해 여자씨름 최초의 전관왕을 달성한 이 장사는 올해만 6개, 통산 9번의 장사 타이틀을 보유한 명실공히 여자씨름의 최강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위더스제약 2020 천하장사 씨름대축제'를 마지막으로 올해 일정을 마치고 오는 28일까지 달콤한 휴식에 들어갔다.

그의 대표 기술인 들배지기는 이전까지 여자씨름에서 볼 수 없었던 기술이다. 들배지기 기술은 체격도 좋아야 하지만 힘과 기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 전관왕을 만든 기술도 들배지기와 안다리 기술이다. 이 장사는 주 특기 기술인 '들배지기'를 이용해 거제시민과 소외계층을 돕는 '사랑의 들배지기' 기부의 뜻을 밝혔다.

이 장사가 시합 때 들배지기로 이기면 적립금을 쌓아 기부하는 방식으로 앞서 2012년 영암군청 씨름단의 김기태 감독이 선수시절 '사랑의 안다리' 사회기부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장사가 사랑의 들배지기 기부를 생각하게 된 계기는 거제시청 입단 이후 조선경기 불황과 코로나19 여파로 지친 거제시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처음 거제시청에 입단했을 때와 달리 요즘은 많은 시민이 알아보고 거제시청 씨름단을 응원해 준다"며 "그동안 거제시민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에 내년에는 꼭 '사랑의 들배지기' 기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또 "지금은 조선경기 불황과 코로나로 많은 시민이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좋은 날이 오리라 믿고, 힘을 냈으면 한다"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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