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주 수필가
이양주 수필가

꽃에 베이다니. 꽃이 사람 마음을 베이게 한단다. 화엄사에 사는 홍매 한 그루가 하도 붉어서 검은색이 돌아 흑매란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보는 순간 마음이 쓰윽 베인다고 한다. 그 얘기를 처음 듣자마자 피가 온몸을 한 바퀴 돌며, 마음속에 그 나무가 쑤욱 들어섰다. 

조선 숙종 때 계파선사가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기념으로 심었다는 홍매 한 그루. 어리고 착한 뿌리 하나가 터를 잡아 삼백 년을 훌쩍 넘겼다고 한다. 기나긴 세월을 제 자리를 지키며 견뎌낸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꽃을 피운다는 의미를, 나는 오래된 삶에게 묻고 싶었다. 

산문을 들어서는 데 마음이 먼저 앞장선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심정이 이럴까. 이런 떨림 가져본 지 언제였던가. 오랜만에 느껴보는 묘한 흔들림이다.

닮고 싶은 인간 모델이 점점 사라져가는 세상, 꽃이라도 닮고 싶은 것일까. 홍매 나무 근처엔 많은 사람의 발길로 붐비고 있다. 근래에 종무소로 걸려오는 전화의 대부분이 홍매의 개화를 묻는 거라고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홍매를 만나고 있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 곁에 다가가 한 풍경 속에 서 보는 사람들, 홍매를 화폭에 담기 위해 삼 년째 먼 길을 달려왔다는 화가도 있었다. 꽃이 피는 건 잠시라며 때를 맞추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우리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 같은 순간도 참으로 짧지 않은가.

인간의 몸을 빌려 난 부처의 피가 이렇게 붉었을까. 수백 년을 법음(法音) 법향(法香) 속에 살아서일까, 늙은 가지가 비틀어지고 굽었으나 참으로 멋진 자태를 지녔다. 마음이 붉은 꽃가지 위에 앉는다. 봄날 매화 가지에 앉고 싶은 것이 어찌 사람 마음뿐이랴. 하늘도 구름도 머물러 있다. 새와 나비들도 다녀갔으리라. 꽃은 저 혼자 저절로 피는 게 아니다. 저를 스쳐 간 수많은 인연이 있었기에, 공존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쉽게 살지 않았다. 수많은 계절과 모진 시련을 견뎌내고 마침내 피워낸 덕의 꽃이다. 요란을 떨지도 않는다. 교만한 모습도 아니다. 그냥 있어야 할 자리에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할 뿐. 칭찬하려 하나 그런 것엔 이미 초연한 모습이다. 일찍이 보여주려 한 삶이 아니었다.

홍매 곁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방사에 들어 짐을 풀었다. 산사의 밤은 빨리 깊어진다. 이 밤을 몹시 기다렸다.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 있을 월매(月梅)의 암향(暗香)을 맡으며 함께 춘정(春情)을 나누고 싶었다. 헌데 야속하게도 비가 내린다. 잠을 청해보는데 문살에 매화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다. 빗소리가 창호를 적신다. 몸을 일으킨다. 툇마루 끝에 서 있는 우산 하나가 눈에 띄지만, 홍매랑 우산 하나로는 함께 비를 피할 수가 없어 그냥 빗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1500년 고찰도 나무들도 꽃들도 무정 유정물이 다 비를 받아들이고 있다. 밤에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수도자를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비를 맞으며 어둠 속에 홍매가 홀로 서 있다. 다가가 손을 얹는다. 차갑게 젖어있다. 춥냐고 물어본다. 사람은 인정에 늘 흔들리지만, 홍매는 차가움이나 뜨거움과 같은 상대적인 경계는 이미 벗어났기에 초연한 모습이다. 당당하고 붉은 기운이 무척이나 선연하다. 흑매(黑梅)라고 이름 붙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내 피도 이만큼 붉었으면 좋겠다. 수많은 삶의 굴곡 앞에서도 나답게 살아내어, 나라는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생이 있어 다시 이 세상에 와 몸을 받아야 한다면 화엄사 흑매면 좋겠다고 발원한다.

밤이 점점 깊어간다. 발걸음을 옮긴다. 잠든 여러 전각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져간다. 뒤돌아본다. 저기 어둠 속에 법당 하나 우뚝 서 있다. 이 세상 어느 법당이 저리 붉을 것인가. 나는 흑매당(黑梅堂)이라 이름 붙인다. 내 맘속에 살아 숨 쉬는 법당 하나 소중히 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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