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성 본지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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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청년의 횃불, 월남 이상재 선생을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회장, 서울YMCA 한국인 초대 총무 등 우리나라 청년사회문화 운동을 전개한 분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독립협회 창립·독립신문 발간·만민공동회 개회·2.8 독립선언·3.1독립만세운동 등 민족 독립운동에 앞장 선 민족 지도자로만 알고 있지 선생이 조선 말 주미 외교관을 한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특히 미국의 초대공사 1등 서기관으로 파견된 외교관로서 선생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요즘 대한민국은 미·중·러·일 주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보이지 않는 외교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조선 말의 현실과 흡사하다. 북한 김정은의 핵무기 놀음에 조선말 보다 더 복잡한 처지라 해야 맞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주적인 독립외교 보다는 주위 강대국들의 눈치와 보이지 않는 간섭에서 우리는 힘 없는 민족의 설움을 삭이고 외교전쟁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초대 주미공사 1등 서기관이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활약상을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외교관들이 기죽지 않고 당당한 외교에 임하길 기대하며  선생의 주미 외교관 시절이야기와 청년 이상재를 소개할까 한다.

선생은 구한말 세도가였던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일본 유람단에 참가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개화파였다. 그러나 박영호·김옥균 등이 추진한 개화에는 공감했으나 급진적 실행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갑신정변 3년 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에 임명돼 선생은 1등 서기관으로 워싱턴에서 외교관을 시작했다. 국제 외교무대에 처음 발을 내디딘 약소국 외교관들은 미국 워싱턴이 신기하고 어리둥절 했을 것이다. 여기에 당시 주미 청국 공사였던 장음향이 "우리 청나라가 당신네 조선의 상국이니, 조선 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전하는 국서는 응당 주미 청국공사인 본인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라며 뻔뻔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니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재 선생은 당당했다. 그는 당당히 맞서 주미 청국공사 장음향의 말을 일축했다.

"무슨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우리는 엄연히 독립국인 조선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오. 그러니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국서를 전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 일이지, 청국인 당신네가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소."

그리고는 공식 절차를 밟아 미국 대통령을 만나 신임장을 제출하고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벌렸다. 우리나라를 중국의 속국 정도로 인식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워싱턴 정가의 외교관들이 이상재의 당당함에 감탄했다고 한다.

130년 전 미국의 워싱턴 외교관 사교계에서 이상재 선생을 더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선생의 독특한 복장 때문이다. 선생은 외출할 때 상투 튼 머리에 망건과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걸친 차림이었고, 의회나 외교모임에 참석할 때는 사모관대와 조복을 고집했다. 그래서 선생이 사교모임에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선생에게 쏠렸고 그가 길거리에 나서면 구경꾼들이 줄을 이었다. 그렇지만 선생은 전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마다 그 나름의 특색이 있거늘, 내가 내 나라의 고유 복색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자존심과 배짱도 이정도면 국제급이다.

선생은 외교관으로서의 자존심과 기개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임기응변과 직설화법이 아닌 위트와 유머로 상대로 하여금 화를 낼 수 없게 만드는 화술의 소유자였다. 1910년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되기 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이완용·송병준 등 매국노라 불리는 자들과 마주 앉게 됐다. 그는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두 대감은 일본 동경으로 이사를 가시는 게 어떻겠소?"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두 사람은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오?" 했다. 선생은 "대감들은 뭐든 망하게 하는 데에는 천재이니, 대감들이 일본 동경에 이사를 가면 일본이 망할 것이 아니겠소"라고 했다.

이 말은 지금 들어도 통쾌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이 배일친러 정책을 표방하자 영·미의 지지 하에 식민지화 방침을 확정짓는 '대한방침'을 결의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1910년 경술국치, 국권피탈로 이어지는 시기에 이상재 선생의 당당함을 우리 외교에서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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