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인자 계룡수필 회원

팔을 살짝 걸쳐본다. 가만히 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얼른 뿌리치고 한 걸음 앞서 갔을 터인데, 흥겨워하는 내 기분을 간파했을까.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예 맡겨버린다. 무언의 허락을 얻었으니 팔짱을 꼈다 손깍지를 꼈다하며 숫제 내 마음대로다.

모처럼 마음먹고 데이트를 즐기려 한다. 먼저 저녁부터 해결하고자 원하는 음식을 권해보는데, 냉면집을 가리킨다. 그는 물냉면을 좋아한다. 곱빼기를 먹고도 사리 하나를 더 시킬 만큼 엄청 좋아한다. 그런 점에서 나와 식성이 비슷하다.

나 역시 물냉면을 좋아하니 무얼 먹자는데 이견이 있거나 조율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 저녁을 먹었으니 다음 코스다. 죽 이어진 상가를 지나치려는데 신발 하나 사주길 기대하는지 가게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한다.

‘이 가게 신발 가격 만만찮은데.’

잠시 머릴 굴리다 문을 밀친다. 따라 들어오는 얼굴에 미소가 숨어있다. 싼 걸 골랐으면 좋겠는데. 가격이 십만 원대에 육박하니 은근히 마음 쓰인다. 나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을 기웃거린다. 그러더니 웬걸, 기획 신발에 점을 찍는다.

고맙게도 나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주는구나. 다행이다. 이 정도면 두 켤레도 가능하다. 고마운 마음에 하나 더 사주려는데 사양한다. 환해진 얼굴에 화색이 돈다. 받는 것도 좋지만 주는 즐거움도 쏠쏠하다는 생각에 괜스레 기분이 좋다.

오늘 데이트의 주된 목적은 영화 관람이다. 극장 안은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다들 ‘일본 침몰’이라는 영화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표를 끊기 위해 한참이나 줄을 서고서야 두 장을 손에 넣었다. 매진 될까하여 미리 오다보니 상영시간이 아직 한 시간 가량 남았다.

사람들로 대기실이 복잡한데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왁자지껄한 소음에 얘기가 끊어지다가 아예 묻혀버린다. 차라리 아이쇼핑이나 즐기자며 밖으로 나온다. 

거리가 활기차다. 네온사인에 불이 들어오고 휘황찬란한 간판들이 불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활개를 친다. 상가 쇼 윈도우에 눈길을 준다. 불빛을 받아 그런지 색감이 좋아 보이는 지갑이 눈에 띤다. 가방에 든 내 지갑과 비교가 된다. 오래전부터 써왔던 검은 지갑이 낡을 대로 낡아 바꿀 때가 되긴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십 수 년을 썼으니 정이 들어 바꾸는 게 쉽지 않다. 

눈도장을 찍어놓고 그의 얼굴을 살핀다. 그런데 딴전이다. 응석 부리듯 그의 팔을 툭 쳐본다. 미동도 없다. 주머니 사정이 녹녹치 않은 모양이다. 분명 비상금을 윗저고리에 넣는 걸 봤는데. 그의 반응에 살짝 서운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것 하나 못 사주나. 늘 주기만 하는 나도 때로는 하나쯤 받아서 간직하고 싶은데. 할 수 없지. 가난한 그를 이해해야지. 늘 오늘만 있을까. 기다려보자. 오래 전 내 귀에 대고 속삭이던 말이 떠오른다. 근사한 옷과 예쁜 목걸이도 사주고, 벼라 별것 다 해줄 거라 한 말을 기억해내며 영화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번엔 그가 나의 팔을 친다. 고소한 팝콘 냄새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이구, 그 정도는 자기 주머니 좀 털지 않고서.’ 속마음과는 달리 최고 큰 것과 덤으로 콜라까지 사들고 좌석에 앉는다. 그의 손길이 바쁘다. 팝콘과 음료수를 번갈아 먹으면서도 눈길은 화면에 꽂혀있다.

그는 책보고 영화 보는 것이 취미다. 나도 그렇다. 알고 보니 우린 공유하는 게 꽤 된다. 서로 얘길 나누다보면 생각이 같음에 놀랄 때도 있으니 참 잘 맞는 사이긴 한가 보다. 잠시 엉뚱한 생각에 잠겨있던 나의 귀에 강한 폭발음이 들린다.

나도 놀라긴 했지만 화들짝 그가 더 놀라며 어깨를 움찔거린다. 그 덩치에 겁도 많다. 피식 웃음이 난다. 나보다 큰 키에 칠십 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지닌 덩치가 놀라기는. 그도 멋쩍은지 애매모호한 웃음기를 흘린다.

여름이 아닌데도 냉방기를 가동했는지 피부에 와 닿는 냉기가 여간 아니다. 슬슬 소름이 돋는다. 겉옷을 벗어 다리를 가린다. 그래도 서늘하다. 눈치 챘는지 그가 슬며시 윗도리를 벗어 내 어깨를 감싸준다. 입으라며 도로 벗어주려는데 아예 나를 껴안고 풀어주질 않는다.

옥신각신하다 그의 고집에 내가 꺾이고 만다. 헐렁한 반팔 티셔츠만 입은 건장한 몸이 그대로 드러난다. 멋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참 포근하다. 얇은 옷이지만 따뜻하게 감싸주는 덕에 서늘함이 한결 가셨다. 그런데 마음은 편하지 않다. 냉기가 그의 몸에도 닿을 텐데 싶어서이다.

영화가 끝났다. 내가 늘 먼저 손을 잡았었는데 이번엔 그가 나의 손을 꽉 잡고 출구를 찾는다. 슬며시 묻는다. 이태 전까지만 해도 팔짱을 끼거나 손잡는 걸 무지 싫어하지 않았던가. 그의 말이 참 고맙고 감동이다. 그 땐 내가 어렸으니 보호를 받아야 했고, 지금은 그 반대니 당신을 보호하고 챙겨줘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아니냐고.  

오늘 데이트는 참 따스했다. 철부지인줄 알았는데 나의 차가운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덤으로 마음까지 훈훈하게 데워주는 듬직한 남자일 줄이야. 언제 저렇게 커버렸는지. 몸만 커진 게 아니라 마음도 성큼 자라버린 나의 분신을 여태껏 어리게만 생각했었다. 다칠까 염려스러워 밖에 내놓는 것조차 늘 조심스러웠다.

이젠 외출하겠다면 꼼꼼하게 이유를 따져 묻지 말아야지. 적당히 풀어 둬 세상과 부딪치게 해줄 참이다. 그를 믿는다. 따뜻한 마음을 가졌고, 생각도 깊으니 밖에 나서서 덜컥 사고 칠 일을 벌이지 않겠지. 

연하의 그와 눈부신 날에 또 한 번 데이트를 즐겨야겠다. 돌아오는 길에 팔짱을 끼며 이러저러한 얘길 나눠야지. 혹여 속에 담은 서운한 마음이 있다면 훌훌 털어버리게도 하고 고민거리도 터놓을 수 있도록 친구 같은 엄마가 되어주어야지.

어쩌면 내가 생각한 날보다 더 빨리 눈도장 찍어둔 지갑을 받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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