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칼럼위원

<#1> 벼농사를 짓는 농부가 있었다. 그는 무던히도 성미가 급했다. 논에 모를 심어 놓고 돌아서서는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아침마다 논에 가보았지만 도무지 자라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급히 논으로 달려가서는 모를 하나씩 쑥쑥 잡아당겨 주기 시작했다.

<#2> 호두농사를 짓는 농부가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부지런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장마가 길어지거나 태풍이라도 지나고 나면 수확이 변변찮았다. 가을만 되면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참다못해 농부는 하느님에게 항의를 했다.

“하느님, 내가 열심히 일하면 수확도 많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래 가지고 누가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하느님이 대답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내가 날씨를 마음대로 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보렴.”

하느님의 허락을 받은 농부는 호두가 잘 자랄 수 있도록 1년 내내 따뜻한 햇볕과 적당한 비를 내렸다.

장마도 가뭄도 태풍도 없었다. 호두나무는 크고 잘 생긴 열매들로 주렁주렁 열렸다. 농부는 기분이 좋아져서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마침내 농부는 다른 해보다 훨씬 많은 호두를 수확했다. 그런데 호두의 속을 쪼개자 그 속은 모두 비어 있었다. 호두는 추운 날씨와 세찬 비바람을 견디어 내는 과정에서 알이 채워져 간다는 사실을 농부는 미쳐 알지 못했던 탓이다.

참 딱한 농부다. 지혜롭지 못한 탓에 농부는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 농부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 자식을 키우고 있는 오늘날의 부모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들은 아이가 무엇이든 빨리빨리 되어주기를 바란다. 말도 빨리 익혔으면 좋겠고 글도 빨리 깨치기를 바란다. 다른 아이보다 조금 빠른 행동을 보고 우리 아이는 천재라고 착각한다.

오죽하면 임신한 엄마가 뱃속의 아이 들으라고 자기도 할 줄 모르는 영어테이프를 틀어 놓고 있다. 아이가 자라면서 남들 보다 조금 빠른 것이 엄마의 우쭐거림의 정도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달에는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는 것이 있다.

지능만 하더라도 3살에서 6살 정도에는 창의성, 사회성, 도덕성이 발달하는 시기이며, 6살에서 12살 무렵이면 주로 언어나 수학적 사고의 발달이 집중적으로 이뤄진다고 본다.

초등학교 교육기간이 6살에서 12살까지 인 것은 바로 이런 연유다. 그러니 제발 좀 서두르지 말자. 조금 나은 것으로 호들갑을 떨거나, 조금 모자라는 것 때문에 아이를 몰아 붙이지 말자.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이 열리듯이 아이들은 잘하는 것이 있으면 못하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교육은 ‘기다림’이 필요하다.

벼를 빨리 자라게 하겠다고 모를 뽑아 놓았다가는 결국 벼를 죽이고 만다. 경상도 속담에 ‘졸갑시런 귀신 물밥처신도 못한다’ 는 말이 있다. 부모들의 서두름이 아이를 더 더디게 만들뿐이다.

지혜로운 부모는 기다릴 줄 안다. 그러면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교육적 처치를 해줘야 한다.

기다릴 줄 모르는 부모는 언제나 자기 자식에게 좋은 환경만 고집한다. 좋은 환경이란 아이의 뜻대로 아무 불편함 없이 보살펴 주는 것으로 오인한다.

호두를 키우는 농부처럼 햇볕은 늘 따뜻하고, 비도 적당하게 내리고 바람도 태풍도 없는 보살핌이 자녀를 바로 키우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아이들에게는 용기를 가지면 이겨낼 수 있는 어려움도 있고, 좌절하지 않을 만큼의 슬픔도 있고, 게으르지 않다면 충분한 일거리도 주어야 한다.

배고픔도 알아야 하고, 세상에는 하고 싶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도 깨닫게 해야 한다.

비가 오면 비를 맞을 줄도 알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허리를 숙일 줄 아는 들꽃의 지혜도 터득해야 한다. 이는 생각으로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혀야 한다.

지난번 태풍 에위니아가 왔을 때 학부모들은 어떻게 했는가? 비 오고 바람 부는 데 휴교하지 않았다고 학교 전화통에 불이 났다.

그런데 그 날 방송에서는 전라도 쪽만 위험성을 경고했고 남해안은 관심밖에 있었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비가 온 시간대가 오전 8시 15분경이었다. 그 시간이면 대부분 학생들은 등교를 끝냈고 조금 늦게 등교하는 학생들만 문제였다.

그렇다 치고라도 이미 학교에 보냈으면 학교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학교가 어련히 알아서 안전하게 하교를 시켜주겠는가 마는, 비 맞은 자식이 안쓰럽고 가슴 아파 못보는 사람들이 빨리 하교 안 시킨다고 전화통에 대고 닦달질이다.

시달리다 못한 학교는 단축수업을 하고 하교시킨다. 비는 억수로 쏟아지는데…, 그런데 우습게도 하교하고 나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햇빛이 말짱했다.

그 날은 선생님들에게 있어 우울한 하루였다. 농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그것이 자식 키우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임을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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