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일 편집국장

▲ 배창일 편집국장

최순실 국정농단 충격이 계속되고 있다. 정·재계를 비롯한 국방·스포츠·문화계까지 그 여파가 미치고 있다. 국정은 사실상 마비된 상태고, 대통령 지지율은 3주째 5%에 머물고 있다.

집권 여당은 내부적 혼란으로 분당위기에 처했고, 야당들은 복잡한 정치적 셈법 계산에 여전히 허둥대는 모양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는 최순실 게이트 관련 의혹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한숨과 절망으로 다가온 지 오래다. 광장에는 또다시 촛불이 등장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1조2항의 가치를 믿는 국민들이 광장에 모인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하야와 퇴진을 요구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청와대에 들리지 않고 있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1주기가 다가왔다. 한국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YS는 재임기간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남북 정상회담 제안, 지방자치제도 확대, OECD가입 등으로 전 국민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부른 대통령이라는 이유 때문에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 드라마틱한 88년간의 삶을 산 YS는 군사독재라는 암흑 속에서 제 몸을 태워 빛을 밝힌 촛불이었고, 총칼로 입을 막던 시대에 권력과 당당히 맞선 투사였다.

YS는 만 26세였던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 공천을 받아 거제군 국회의원이 됐다.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프리미엄은 덤이었다. 그러나 YS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이른바 '사사오입' 원칙을 내세워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미련 없이 자유당을 탈당해 야당 정치인 생활을 시작한다.

1961년 5월16일. 당시 신민당 원내부총무였던 YS는 고향 거제에 머물다 곧바로 상경한다. 박정희 장군이 중심이 된 군부가 장면 내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군정을 비판한 YS는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발표하자 윤보선 등과 함께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동참한다. 이때 YS는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1972년 10월, 하버드대학교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YS는 급히 귀국길에 오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헌법을 고쳐 국민의 대통령 선거권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YS는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귀국을 선택했다.

예상대로 박정희 정권은 그를 가택연금하며 손발을 묶어버린다. 길고 처절한 민주화 투쟁의 시작이었다. 1974년 8월, 만 45세의 나이로 최연소 야당총재에 취임한 YS는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을 향해 반유신투쟁을 선언한다.

1979년에는 이른바 'YH 사건'으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의원직 제명 직후 YS는 "나는 오늘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겼다.

YS의 의원직 제명은 박정희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됐다. YS가 제명됨에 따라 야당 국회의원 전원이 의원직을 사퇴했고, 이것이 국민의 분노를 촉발해 '부마민중항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부마항쟁은 결국 10·26사태로 이어졌다.

10·26으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지만 YS의 민주화 투쟁은 계속됐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올랐기 때문이다. 1983년 YS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언론 통제 전면 해제 등 5개항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선언한다.

YS의 단식은 로이터·AP·교토통신 등에 의해 일제히 국제사회에 보도됐다. 국내에는 재야인사들이 대학가와 골목을 돌며 '김영삼 총재 단식 돌입'이라는 유인물과 전단지를 뿌렸다. 계속된 단식으로 건강이 악화된 YS는 재야인사들의 간곡한 권유에 23일 동안 지속된 단식을 중단한다.

당시 그는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다.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다.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이다"고 말했다.

YS의 민주화 투쟁은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으로 결실을 맺었다.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시대의 전환기를 이끌며 언제나 그 중심에 서 있었던 YS. 또 다시 국민들이 광장에 나올 수밖에 없는 혼란한 현실 속에서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당당히 맞서던 그의 모습이 그립기만 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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