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전남 나주에 다녀왔다. 나주를 처음 방문한 것은 24년 전이었는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갓 출간됐을 때다. 단숨에 읽어내린 남도 이야기는 도무지 내 눈에 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책을 도우미 삼아 일주일을 남도와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도 사실 나주는 잠시 스쳐지나가는 일정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도 배박물관에서 본 '수박만한 배'만 기억날 뿐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나주에 혁신도시가 들어서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콘텐츠진흥원이 이전해오면서 문화예술 정책과 지원의 중심지가 됐다.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나로서는 예전에 비해 한결 친근해진 듯하다.

이번에 나주를 방문한 것은 나주문화원에서 주관하는 '안성현 국제학술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안성현은 1920년 나주 남평에서 태어난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 안기옥은 가야금 산조의 대가였다. 아버지의 명성과 음악성은 안성현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내내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본 도호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한 안성현은 해방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와 전남여고, 광주사범, 조선대학교를 거쳐 목포항도여중 교사로 자리 잡게 된다.

1948년, 항도여중 예술제에서 '부용산(芙蓉山)'을 발표하고, 소월의 시에 붙인 '엄마야 누나야' 같은 서정성 짙은 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무용가 최승희 등과 함께 북으로 간 후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으며 왕성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너무 예술적 접근을 중요시 하다 혁명성과 거리가 있다하여 양강도로 일종의 유배를 가게 되었다고 북한의 사정에 밝은 학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2006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그 시절 재주 있는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남과 북의 체제 모두에게서 기대만큼의 예술적 적응을 하지 못한 채 표류했던 것 같다.

'부용산'은 항도여중에서 국어교사로 같이 근무했던 박기동의 누이동생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오라비의 마음을 담아 쓴 절절한 시에 안성현이 곡을 붙인 것이다.

가사를 소개하면,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사실 시의 완성도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 가사에 붙인 안성현의 선율은 애절함이 철철 넘치도록 감성을 자극한다.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애창되던 '부용산'은 어느 순간 '빨치산의 노래'로 둔갑하는데, 나이 어린 처자들이 총을 맞거나 병이 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 가사와 선율이 빨치산의 감정을 이입하는 데 적절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부용산은 창작 동기와 전혀 다른 현장에서, 전혀 다른 용도로 불리기 시작했고 그런 이유로 한 동안 우리 곁을 떠나 있는 노래가 됐던 것이다.

'엄마야 누나야'도 사실 사연이 좀 있어 보인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소월 시에 붙인 '엄마야 누나야'는 세 사람의 작곡가가 있다. 시기 순으로 보면 안성현·김광수·이영조 순이다.

작품을 두고 어느 것이 더 뛰어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원조가 안성현인 것만은 사실이다. 월북 작곡가, 부용산의 작곡가로 낙인찍힌 이후 '원조 엄마야 누나야'는 사실상 우리에게서 사라졌고 현재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곡은 김광수의 작품이다.

한국일보 '김성우의 에세이'에 보면 박기동의 표현을 빌려 안성현을 '극단적 낭만주의자'로 표현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마 그게 가장 적절한 수사일 거라 추측된다.

남북 관계가 극단적 대치 국면으로 치닫고, 국감장에서 벌어지는 무례와 무지를 보면서 그렇잖아도 지진과 태풍으로 어수선한 상황이 더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살아 보니 내 할 일만 열심히 제대로 하기에도 시간이나 체력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곁눈질 해가며 남의 인생에 개입할 여유를 가지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 잣대 몇 가지, 이를테면 안보와 이데올로기 같은 문제로, 치열하게 살아온 또 살아가는 인생들을 함부로 재단하는 일은 이제 사라져야 할 시대가 됐다. 월북과 방북과 억북 조차 구분 못하는 아니 구분하지 않으려 했던 시대를 이제 떠나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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