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석 칼럼위원

▲ 이아석 남해안시대포럼 의장
서구 문화와 문물이 한참 쇄도했던 일제시기에서부터 우리는 부지불식 간에 문화예술의 진가에 대한 혼란과 오류를 경험해 왔다.

시와 노래의 전형이었던 시조가 자유시의 등장으로 잠시 밀려났던 것 만큼 춤이 무용으로, 마당놀이가 오페라와 버라이어티쇼로, 붓 대신 검정 숯을 쥔 서구 조각상의 댓상 연습이 미술교육을 대신하는 그런 창작환경의 변형이 도래했다.

영화가 들어오고 그 영화의 상영 환경이 극장이라는 제한된 것은 말할 나위 없지만 공연이라는 마당놀이의 전형이 아예 극장무대로 인식되어버린 것은 고지식한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춤이건, 서양춤이건, 발레건, 음악회와 모든 유사 공연들이 서구식 극장문화를 만들었고, 자연을 벗 삼아 질펀하게 신명으로 어우러지던 고유의 춤마당과 마당놀이가 뒷전으로 밀려나고만 있었다.

여기에 관해서는 문화 환경이나 창작의 틀을 지적할 이유는 없다. 적어도 그것은 시대적 조류와 문화발전의 변형적 시기에 일어 난 자연적 현상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동쪽 어느 마을에서는 해마다 10월 말이면 전원음악회가 열린다. 개인이 출자해 조성한 도예공원의 언덕과 공간에 여기저기 모여 앉아서 굳이 성악전문인이 아니어도 낯익은 명사들이 나와 노래를 하고 관객들은 그걸 즐긴다.

또 다른 시간에 부산의 남쪽 사설공원에서는 야외음악 무대에서 성악인과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지는 소탈하고 정겨운 음악의 밤이 저물어 간다.

공연 지인의 낡은 건물 지하에 마련된 초라한 무대에서는 모노드라마가 펼쳐지고,산책로의 울타리에는 근처 문학도들이 마련한 시화가 걸려 오가는 사람들의 정서를 자극한다.

공원을 제대로 마련할 땅이 비좁은 곳에 쌈지공원이 생겨나듯 각박하고 비좁은 도시 공간마다 격식과 고정관념을 뛰어 넘는 다양한 문화예술의 표현들이 어우러지는 것이다.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새롭고 낡은 건물들이 시공을 달리하는 골목길 목로주점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과 지망생들이 둘러 앉아 창작의 에너지와 애환으로 술잔을 나눈다.

거기로부터 자갈치의 먹장어 구이집으로 이어지는 오랜 객기들이 부산이라는 도시의 예술거리를 만들고 있다.

문화예술이 무슨 서구식 공연장이나 권장 행사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곰팡이가 페니실린을 위해 슬어 모이듯 예술적 정서는 예술적 곰팡이들이 모여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문화예술의 분야를 도식적으로 정해 놓고, 문화예술을 진작시키는 명분의 고지식한 시설을 전제하는 행정을 선점해 놓고, 복지 시혜를 늘어놓는 문화예술에 대한 착상을 하는 일은 참으로 무지몽매한 행위다.

예술창작이나 진흥은 개량적인 권장이나 도식적인 시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예술창작이나 예술문화에 대한 시민의식의 제고는 자유롭고 독창적인 사람이 중심이 되는 환경과 그런 사람들의 기질을 옹호할 수 있는 외경심에서 가능한 일이다.

수려한 해안 공간과 창작 기질을 가진 향토에서 어느새 각박한 산업메카로 급변했거나 살벌한 배후주거지로 난립하는 처지가 되었다면 그 원인과 과정을 잘 분석하고 손질해서 앞 서 소개했던 대도시 부산이 피난수도의 혼란과 항만도시의 생경함을 극복하고 다양한 예술진작의 메카로 부상하는 수범을 한번쯤 들여다 보아야만 한다.

지방의 특산물이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신기루가 아니듯이 그 지방의 문화예술이 도식적인 행정 시혜나 정책으로 이루어지는 공산품이 될 리는 만무하다.

거대한 서구식 공연장을 만들어 물량적 문화공간을 조성하는 일도 한 가지 방안일수는 있으나 그런 관람식 행사 위주의 문화예술이 압도하는 환경에서 우리가 희구하는 독창과 예술적 정서가 제대로 성장한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각 지방마다에 고유의 역사를 정립하고 그 가치를 발굴하여 애향심과 정서를 어우러지게 할 맥락을 짚어내야 한다.

아직도 문화예술이 무슨 공연시설이나 만들고, 한적한 곳에 예술인 주거지를 배려하거나 작고 예술인의 기념관을 만드는 의례적인 관행쯤으로 여긴다면 그 인식의 오류부터 시정해나가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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