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초반까지도 먹고 살기 어려울 때다. 이때 보릿고개란 말이 있었다. 보리가 익을 때까지 먹을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 어려운 때에 죽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면서 살아야 했다. 아무리 험하고 높은 고개라 해도 이때만큼 지내기 어려운 때는 없었다.밀과 보리는 겨울에 심어서 이듬해 봄에 수확을 한다. 가을에 수확한 쌀이 부족해 보리가 익을 때 까지 지내기가 가장 어려웠다. 그때를 지내기가 어려워 힘든 보릿고개란 말이 생겼다.보리와 밀은 월동작물로, 겨울을 잘 지내야 수확이 좋다. 월동상태는 한해나 습해로 크게
거제도 남쪽 해안가에 있는 다포마을이다. 이 마을 건너편 북쪽은 다대마을이고 동쪽은 해금강, 서쪽은 여차마을이 있다.이 사진은 1978년 가을에 촬영한 사진이다. 물이 나간 다포항은 해안이 다 보이고 누렇게 익어 가는 벼와 신록의 푸른 숲과 청정바다에 둘러싸여 있다.다포마을은 바다에 복주머니가 떠 있는 것처럼 복스럽게 생긴 마을이다. 이 마을은 거제의 남쪽 가라산과 마을 뒤 천장산이 감싸고 있는 아늑한 포구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어촌이지만 산록에 비옥한 토지가 많아 농어업을 주업으로 살았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지역적
조선시대 성인 남자들이 갓을 쓸때 갓 밑에 받쳐 쓰던 게 탕건이다. 탕건은 선비들이 집에 있을 때 쓰는 모자다. 말총으로 엮어 만든다. 또는 대나무를 얇게 썰어 만들기도 한다. 뒤가 높고 앞이 낮도록 턱이 져 있으며, 맨 위는 반원형으로 평평하다. 말이 많은 제주도에서 만든 탕건이 가장 유명하다. 탕건을 만드는 사람은 기능보유자다.사진은 1971년 거제군청 앞에서 자신이 만든 탕건을 들고 있는 모반윤씨다. 이분의 윗대 조상은 중국 송나라 때 이부상서를 지낸 모경(牟慶)이다. 그 후손이 우리나라 함평과 광주에 정착했다.모씨는 통영이
광리마을은 거제시 사등면 견내량과 통영시 용남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농어촌 마을로,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어업은 부업으로 해왔다. 부산과 여수로 연결한 뱃길로 물이 맑고 주변경치가 좋은 곳이라 해서 이 지역을 한려수도 견내량해협이라 한다.해협이 좁고 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곳이 바다로 느껴지지 않는다. 임진란 때는 일본군이 성을 쌓아 바다를 지키던 왜성이 있는 곳으로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광리마을 앞 바다는 잔잔한 호수처럼 보인다. 이곳 미역은 맛이 좋고 영양가가 높아 옛날부터 임금님의 밥상에 올
거제시 일운면 바닷가에 아름다운 비경지가 있다. 공곶이다. 이곳은 와현 연대봉 남쪽 바닷가에 있는 한적한 곳이다.따뜻한 해안가에는 전답이 있고, 어패류가 잘 자라서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던 곳으로 패총의 흔적과 돌칼·돌도끼 등이 발견된다.1866년 병인년 천주교박해 때 진해에 살던 윤형문·윤봉문 형제가 복음을 전도하면서 숨어 살았던 곳이다. 이후 일본사람들이 어장을 하다 광복이 되면서 두고 간 곳에 민가 서너집이 살았으나 교통이 불편해 외지로 나갔다. 비어 있었던 곳에 강명식씨 부부가 이곳에 정착해 농원을
계룡산 아래 있는 피난민촌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북진할 때 중공군 개입으로 1951년 1월4일 후퇴를 하게 되자 공산치하에 살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남하를 하게 된다.이때 흥남부두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배를 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후퇴하는 배에 피난민을 수송하기 위해 김백일 1군단장과 10군단 소속의 현봉학 민간인 고문이 에드워드 알몬드 10군 단장을 적극 설득해 많은 피난민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했다.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철수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고, 온양
1971년 통영을 연결하는 거제대교가 개통되고 나서 둔덕지역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둔덕은 983년에 거제를 통치하던 기성현이 있었고, 1170년 정중부의 반란에 의종 왕이 피신 와서 3년 동안 살던 곳이다.서해안 지역의 여수·남해·통영지역과 가까운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정해 살았다. 산방과 농막지역의 고분과 신라시대 축성한 기성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산 좋고 물 좋고 비옥한 토지가 있어서 일찍부터 인류가 정착해 살았다.둔덕의 생활권은 통영이다.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를 사이에
거제시 행정 동우회(손경원 회장) 회원 70명은 9일 경북지역의 문화와 관광에 대한 탐방을 했다.이날 탐방은 대구수목원의 국화축제와 올래 길을 탐방하고, 송해 공원을 탐방 했다.대구 수목원의 국화 축제와 거제 섬꽃 축제와 비교 하는 관광 축제가 되었다.거제 섬꽃 축제는 바다와 접한 농경 지역이지만, 대구 수목원 축제는 산속에 위치한 곳으로 규모나 꽃밭 조성이 거제 보다 열악해 보이지만, 산속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같은 꽃 축제지만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대구시 달성군 옥동읍 기세리에 있는 송해 공원은, 노래자랑 사회
이 사진은 1990년 2월24일 새로 지은 거제군청 입주 개청식을 하는 날이다.거제역사를 보면 삼한시대 변한 12개국 중 두로국(瀆盧國)이란 나라가 있을 만큼 번성했다. 677년 문무왕 때 상군(裳郡)이 됐고, 757년 경덕왕 때 거제군이 됐다. 이때부터 거제로 불렸다.거제군에 아주현(鵝州縣)·송변현(松邊縣)·명진현(溟珍縣)이 있었고, 983년에 둔덕에 기성현을 설치했다. 1170년 정중부 반란으로 의종왕이 둔덕 기성현으로 피난 와서 3년간 살았다.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으로 1271년 거창 가조현 등지로 피난
이 사진은 1970년 옥포정 낙성식을 하는 장면이다. 옥포정은 옥포 당등산 옥포대승첩 기념탑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건설됐다.옥포정 건물은 장목진 객사의 부속건물인 비장청을 1963년 6월27일에 뜯어와 이곳에 건립하고, 1970년 국고보조로 옥포정에 부연을 달고 단청을 했다.그 단청 공사 감독을 필자가 했다. 그해 가을에 옥포정 낙성을 하고 문화예술행사를 했다.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처음 왜적을 무찌른 옥포대첩지다.옥포해전을 기념하고 성웅 이순신 장군의 우국충정과 멸사봉공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계승하기 위해 1957년 하
거가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거제에서 부산·마산·진해 등지로 가는 교통수단은 배를 이용한 여객선이었다. 거제연안과 통영·남해·여수 등지의 교통도 여객선을 이용했다. 여객선을 이용할 때는 거제도에서 성포항이 제일 많이 이용하던 항구였다. 옥포와 장승포 두모가 그 다음이다. 거제·하청·장목항을 비롯해 저구·율포·가배·해금강·도장포·지세포 등지의 해안에서 여객선이 출항했다.제일 중요한 해안교통로는 부산
농기구 없이 인력으로 농사를 지을 때 아이들을 맡겨놓을 곳이 없어서 그 시기만 되면 아이를 돌보는 '농번기 탁아소'가 생겼다.'농번기 탁아소'는 1961년 아동복리법이 제정돼 탁아시설의 설치기준과 탁아기간의 보호내용 등이 처음으로 규정됐다. 이때부터 지역마다 농번기 때 탁아시설이 생겼다. 새마을사업으로 사회발전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면서 어린이를 보호하는 탁아시설이 전국으로 확산됐다.1977년에는 탁아소가 전국에 600여개소가 생겼다. 그러나 어린이집을 도시 빈민층과 농어촌 아동 외에 일반가정 아동에게도 개
현재 이곳은 거제시청에서 고현동사무소를 지나 사거리에서 동쪽 독뫼산 쪽으로 내려가는 왕복 2차선 도로가 있는 곳이다. 이 사진은 1972년 촬영한 것이다.이때 고현시장 사거리 아래 북쪽지역은 바다였고, 사거리에서 상동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띄엄띄엄 집들이 있었다. 서문으로 가는 길가에 고현시장이 있었다. 이때만 해도 포로수용소 막사를 뜯어다 지은 함석집들이었고, 고현시내에 2층집이 서너 곳 있었다. 한 곳은 고현시장 입구 목재건물 2층집이고, 한 곳은 이 하천 사거리 왼쪽으로 1층은 술집이고 2층은 섬다방이었다.또 하천가에 은파사진관
거제도는 삼한시대 변한 12개국 중의 하나였던 두로국(瀆盧國)이란 나라가 있을 정도로 큰 섬이다.육지와 가깝게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농·어업 문화가 발달해 많은 사람이 정착해 살았다. 집단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에는 물품을 거래하는 장이 있었다.아주장터와 하청장터가 오래된 것으로 전해져 온다. 하청장터는 연초면 덕치마을이다. 이곳을 장터고개라 한다. 그리고 거제장과 고현장이 있었다. 이보다 앞서 장승포에는 일본인이 들어오고부터 장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이 사진은 장승포의 옛 시장 모습이다. 1970년 초에 촬영한 사진인데
거제시 사등면 가조도에 옛날에 놋쇠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 조선 말기까지도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놋쇠로 만든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놋다리마을이라 했다. 놋다리 마을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놋쇠 유(鍮)에 다리 교(橋) 자를 써 '유교(鍮橋)'라 했다.놋다리마을은 가조도 옥녀봉이 여인처럼 다소곳이 앉아서 치마폭을 동남으로 펼쳐놓은 것 같다.이 마을 북쪽에 천하명산인 옥녀봉이 바다 속에 있었다. 이곳에 묘를 쓰면 큰 부자가 되거나 큰 벼슬을 한다고 하는 물 명산이다.먼 옛날부터 바닷가 물 명산에 묘를 쓰고자 했으나
이 사진은 1969년 거제도 해안지역에서 후리어업을 하는 장면이다. 후리어업은 그물을 당겨서 고기를 잡는 어업이다.'후리'란 말은 후리친다는 뜻과 휘몰아 챈다는 뜻이다. 휘감아 온다는 뜻의 어원으로 그물로 휘감아서 고기를 잡는 어업이라 한다.후리어업은 멸치를 잡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어업이다. 이때만 해도 어촌에서는 대부분 노 젓는 배로 고기를 잡았다. 작은 어선에 그물을 싣고 바닷가 멸치떼가 있을 만한 곳에 그물을 끌고나가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물위에 그물을 쳐 놓고, 그물속으로 고기때가 몰리면 배 위에서 그물
● 시대: 삼국시대 ● 출토지 : 傳 거제도 ● 소장 : 거제박물관● 크기: 두께 1.8~2.3㎝, 구멍지름 0.7~1㎝, 바닥지름 3.0~3.7㎝, 몸통 최대지름 3.2~4.5㎝.선사시대 방직술(紡織術)을 입증하는 유물인데,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도구로 방적구(紡績具)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다. 가락바퀴(紡錘車)의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이 구멍에 긴 둥근 막대를 끼워 축을 만들고 섬유를 축에 이어 회전시켜 꼬여진 실을 만든다. 꼬여진 실로 그물을 만들거나 원시적 형태의 천을 만들어 옷을 지어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신석
1970년대 초에 촬영한 고현만 주변의 사진이다. 멀리 장목면의 대금산과 연초면의 남녀산이 보이고 고현동 독봉산 자락이 고현만 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서문에서 고현만 쪽으로 도로가 나 있다. 이 도로는 고현만을 지나 독봉산 북단 바닷가로 나 있다. 물이 빠진 고현만은 빈 들판처럼 보인다. 고현 중심지로 나지막한 집들이 도로가에 자리잡고 있다.집 주변은 가을이 끝난 초겨울의 전답으로 썰렁해 보인다. 마을동쪽에서 서문으로 올라오는 길을 개설하고 있다. 서문 도로변과 선창 주변에는 나지막한 집들이 있고, 마을 가운데 계룡산 줄기의 낮은
1981년 모심기가 끝난 초여름 이봉목 거제군수가 새마을사업 현장과 농촌지역을 둘러보면서 농촌계몽사업과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지시하고 있다. 이때 동행한 공무원은 김장욱·김천수·조정줄·옥종석·정명균 등이다.이때 공무원들은 새벽 일찍 출근해 새마을 현장에 나가 마을사람들과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사업을 했다. 밤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낮에는 현장에 나가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할 때로 공무원들이 입고 있는 옷과 신발부터가 일꾼 차림이다.이봉목 군수는 거제 오수출신으로 거제군청
향토예비군은 1968년 1월21일 북한 공작대 김신조 일당 30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침투시킨 사건 후 동해에서 발생한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반공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탄생됐다.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초 경상남도 하동을 순시하면서 한 연설에서 향토예비군 창설의 의지를 밝혔다. 1968년 4월1일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창설식을 통해 우리나라에는 약 250만명의 향토예비군이 탄생했다. 향토예비군 임무는 국가 비상사태 시 현역 군부대의 역할, 무장공비침투에 대한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