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내도에서 간장을 담그기 위해 콩을 삶아 절구통에 찧어 길쭉하게 메주를 만들어 처마밑에 매달아 놓은 사진이다.내도는 구조라 앞에 있는 작은 섬이다. 내도 밖에 있는 섬은 외도다. 외도가 내도를 사랑한 설화가 흥미롭다. 처녀섬(내도)이 오랫동안 그 자리에 다소곳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마도 인근에서 바람따라 떠돌던 총각섬(외도)이 구조라 앞바다에 있는 처녀섬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처녀섬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밤낮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떠 온 총각섬은 해금강 옆을 지나 드디어 저 멀리 처녀섬을 발견했다. 처녀섬은 소문
1980년 촬영한 사등면 성내마을이다. 이때만 해도 새마을사업으로 초가집이 없어지고, 함석지붕과 기와지붕이 나지막한 평화스런 마을이었다. 마을 주위에는 사등성이 있고 성 밖에는 기성초등학교 운동장 주변에 민가가 있다.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은 들판에는 황금빛 벼가 익어가고 있다.이 마을은 삼한시대 변한 12개국 중의 하나였던 두로국(瀆盧國)의 왕도지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져 오는 왕도지다. 두로국이 있을 때 대리마을 뒤 산에 솟대가 있고, 마을 앞에는 마산 진해 부산으로 통하는 바다가 있다. 마을 앞으로 겨우 차가 한 대 다닐
1960년께 시골 어린이들의 모습이다. 그 때만해도 출산에 제한이 없고 집집마다 여러 명의 어린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 당시는 남존 여비의 사상이념으로 남자는 대우를 받고 여자는 천대를 받을 때다. 농촌이나 도시 할 것 없이 생활수준은 비슷했다.그 당시는 농업을 위주로 하고 살 때라 농촌생활이 넉넉하고 삶의 질도 높았다. 이 사진은 초등학생들의 모습이다. 여자들은 검은 치마에 흰 고무신을 신고 흰저고리 한복을 입었다. 머리는 단발머리를 했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여자들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 남학생들은 검은 바지에 간단한
장승포는 거제의 동쪽에 있는 작은 항구다. 두모에서 장승포로 넘어가는 고개에 당산나무와 장승이 서있는 항구라 해서 장승개라 하던 것이 장승포가 됐다.이 지역은 1432년에는 이운면에 속해 있었다. 이운면은 아주에 있었다. 1889년 한일통어조약이 체결 된 후에 일본 어민들이 우리나라 해안에 와서 정착하게 됐다. 그때 지세포는 조선사람이 많이 살아서 정착을 하지 못하고, 장승포 항구로 오게 됐다.그때의 기록에 의하면 장승포는 산 아래 땅도 없이 능포마을 아래 해안가에 서너집이 살았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현재의 땅을 매립하고
임진왜란으로 거제 현청이 없어진 거제는 오랫동안 통치부재의 섬으로 있었다.1663년 이동구가 거제현령으로 부임해 거제현 치소가 있었던 고현에 와 보니 고현성 안에 있던 거제 현청과 성곽 서쪽에 있었던 거제 향교가 임진란으로 불타 없어져 신라시대 명진현이 있었던 거제면 명진으로 거제현 치소를 옮겼다. 명진에 있던 거제현 치소는 다시 기성관으로 옮기고 향교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그후 1914년 거제군이 통영군에 합병되자, 거제가 통영군에 속하게 됐다. 이때부터 거제지역이 통영군 읍내면이 됐다.1926년부터 거제질청을 거제등기소로 사용
거제의 중심도시 고현은 옛날에 거제현이 있었다고 해서 옛 고(古)·고을 현(縣)자를 써 '고현'이라 한다. 신라·고려시대에는 이곳에 현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 고려 원종 12년 1271년 왜구의 침입으로 거창 가조현 등지로 피난 가서 살다가 151년 만에 되돌아와서 수월리에 정착 했다.1422년 사등성을 축성 했으나 협소해, 고현지역에 읍성을 축조해 1432년에 고현에 거제의 읍기(邑基)를 만들었다.1889년 고현지역이 일운면과 이운면에 속했다. 이때 수월·양정·저산
1975년께 촬영한 옥포항과 옥포 조라마을 사진이다. 옥포항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왜군을 물리친, 조선수군의 첫 승전지인 옥포대첩지가 있는 곳이다. 당시 옥포는 현재 보이는 이 부분에 옥포성이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조라 앞까지 바다였다.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조라 앞바다에 배를 정박하고 옥포와 조라마을에 침입했다. 왜적들이 침입하자 조라마을 사람들은 뒷산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왜적들은 마을에 들어와서 재산과 양식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이때 부산포에 있는 왜적과 싸우기 위해 부산으로 가던 이순신 장군이 옥포항에서
1970년 말께 촬영한 망치마을 사진이다. 이 마을을 지나면 망향마을이 있고, 동부면 수산마을과 학동마을을 지나 해금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망치마을은 거제도의 동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 해안마을로 북병산(北屛山)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마을 앞으로 1988년 장승포∼저구간 국도가 확·포장돼 시원스레 뚫렸다. 해변에는 800여m에 이르는 흑진주몽돌해수욕장이 있다. 이 마을이 생긴 유래는 정확치 않지만 전해져오는 말에 의하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해서 살았다고 한다. 지형적으로 볼때 내도 패총지와 이 마을
1971년 초겨울 거제면 서정마을 입구에서 새마을사업을 하고 있다. 추수가 끝나고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주민들이 나와서 마을길을 넓히고 도로변을 정비하고 있다.'잘살아 보자'는 새마을정신으로 마을 사람들이 삽과 괭이로 땅을 파고 흙을 가져와 땅을 고른다. 부인들은 머리에 흰수건을 쓰고 일을 하고 있고, 남자들도 땅을 파고 흙과 돌을 날라 땅바닥을 고른다.이곳은 거제면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길가에는 초가집과 낡은 함석집이 있고, 차도 한 대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협소하다. 길을 넓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가 집의 땅
장목면에서 외포로 가다가 두모실 고개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산 중허리를 돌아가면 중금산성이 나타난다. 이 산성은 대금산의 중봉(中峯)에 있다고 해서 중금산성 또는 대금산성이라 한다. 이 산 서쪽 화봉산 아래 평지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 있다. 율천마을이다. 사방으로 산이 둘러있기 때문에 바다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심산유곡과 같이 느껴진다. 산속의 협곡 평지에 산록을 의지해 율천성이 자리하고 있다. 둘레 340m·높이 3.3m의 석성(石城)은 동서남북에 문(門)이 있고 문과 문 사이에 망루를 세웠던 흔적이 있다.성의 규모는
사진은 1969년 장평마을에서 대나무를 길고 가늘게 다듬어 대바구니를 엮고 있는 장면이다. 삼성조선이 들어오기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장평에서 대나무로 만든 대바구니·대방석 등 대나무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어 팔았다. 당시 장평지역은 수공업이 발달했고, 대나무로 물건들을 만들었다. 고현 주변에는 대나무가 없었지만 장평마을 앞에는 대나무가 있는 섬이 있었다. 이 섬을 대나무가 자란다고 해서 대섬이라 했다. 한문으로 지명을 고치면서 대죽(竹) 섬도(島)를 써 죽도라 했다. 이곳에서 대나무를 가져와서 여러가지 용품을
1950년 6월25일 북한군 불법 남침으로 국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를 하게 됐다.대구·부산만 방어하고 있는 위급한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미8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게 된다. 이로 인해 남하했던 공산군 일부는 북한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다.1950년 11월 고현에 포로수용소가 생기면서 고현·상동·용산·해명·수월·양정마을 일대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포로수용소에서 좌·우익의
견내량은 거제의 관문이다. 1971년 4월8일 거제대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배를 타고 견내량을 건넜다. 1950년 이후부터 차도선이 생겼다.1965년 거제대교가 생기면서 견내량에 다리교각을 세우고, 교각아래 논에는 바지락을 양식하기 위해 소로 논갈이를 하고 있다. 그 뒤편에 부녀자들이 바지락을 심고 있고, 다리발 사이에는 견내량으로 건너다니는 배가 보인다. 그 뒤로 통영의 산들이 바다 길을 감싸고 있다. 소를 앞세워 힘들여 논을 갈고 있지만. 그 광경이 평화스럽다. 지금은 이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보면서
기성초등학교는 거제시 사등면 성내리에 있는 학교다. 1909년 호주선교사의 후원으로 사등기독교회가 설립되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사등기독교회를 대제학당으로 설립한 것이 시초다.1917년 사등청년회가 이 학당을 인수받아 학교 이름을 기성강습소로 개명했다. 창립 당시부터 사회 명망이 높은 교사를 초빙해 민족정신 계몽과 문화적 생활향상을 위한 교육 등을 도모했다. 체육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최신식 문화를 배우는 학교로 개교됐다.이때는 한문 서당에서 한복을 입고 한문 공부를 했다. 일본의 문화권 속에서 일본의 정신문화와 우리의 생활문화
1970년 전후로 가마니는 우리 생활에서 가장 필요했다. 볏짚으로 만든 가마니는 농가에서 없어서는 안될 만큼 다양하게 사용됐다.가마니는 물건을 담는 포대로 가을이면 논·밭에서 수확한 곡식을 담아 보관했다. 무너진 둑을 쌓을 때도 가마니에 돌과 흙을 담아서 쌓아두기도 했다. 깨·콩을 털 때도 가마니를 깔아 놓고 그 위에서 곡식을 털고 말리고 했다.가마니는 농경문화가 시작되면서 물건을 담아두는데 가장 필요한 포대로 사용했다. 벼농사가 끝나면 볏짚으로 집집마다 가마니를 짰다. 새끼줄을 가마니틀에 줄로 늘어놓고 한
1980년대 거제도 해안에서 멸치를 건조하는 장면이다. 멸치는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잡는다. 멸치가 많이 날 때는 해안가로 멸치떼가 밀려온다. 그럴 때는 멸치가 있는 곳에 그물을 쳐 놓고 육지 양쪽에서 그물을 당겨서 잡기도 한다.멸치는 단백질과 칼슘 등 무기질이 풍부한 식품으로 육지와 가까운 해안에서 많이 잡힌다. 고등어 떼에 쫓기거나 파도에 밀려 바닷가에 쌓이기도 한다.멸치는 다양한 요리와 반찬으로 사용하고 멸치회와 멸치쌈밥은 대중적인 인기 식품이다. 산간벽지에서도 단백질 식품을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멸치다. 고추장에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구호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1969년부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부터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자립해 마을을 가꿨다.이 사진은 1971년 초봄에 마을 앞 도로를 만드는 모습이다. 산 밑에 있는 마을로 당시는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논두렁 길이었다.나지막한 집 담장과 초가집 뒤로 산기슭이 보인다. 남자들은 무거운 돌을 주워오고 부녀자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삽과 곡괭이로 새마을 도로를 개설하고 있다.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 모두 나와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
거제 계룡산 아래 조선시대 거제현이 있었던 고현지역이다. 이곳에 문종 원년(1451)부터 단종 원년(1453) 사이에 축성한 고현성이 있다. 이 성을 기반으로 고현성 서쪽마을은 서문, 동쪽은 동문 마을이라 했다.사진의 마을은 1973년 고현에서 문동으로 가는 도로변 계룡산 아래 있는 상동마을이다. 계룡산을 등지고 있는 마을 주변은 비옥한 토지가 있고, 앞산은 독봉산이다. 고현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 상동이라 했다. 남문천을 경계로 윗상동과 아래상동으로 나눴다.이때는 고현지역에서 서문마을과 상동마을이 가장 큰 마을이다. 1769년
1976년 1월5일 거제시 둔덕면 옥동마을에서 거제면 옥산마을로 넘어가는 산업도로 기공식을 하는 장면이다. 당시는 식량이 부족하고, 산 고개를 걸어서 다녔다.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가면서, 이웃마을과 통하는 도로개설이 가장 중요한 사업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산고개로 도로를 개설한다는 말을 듣고 쌀쌀한 날씨에 마을사람들이 두툼한 모자와 옷을 입고 기공식에 참석한 장면이다. 썰렁한 산과 들판은 한적하고 추위에 웅크리고 있는 주민들의 표정도 추워 보인다. 당시 정태영 군수가 도로개설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이곳은 둔덕 동쪽 윗
1971년 거제와 통영을 연결하는 거제대교가 개통된 후 둔덕지역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둔덕은 983년에 거제를 통치하던 기성현이 있었고, 1170년 정중부의 반란에 의종왕이 피신 와서 3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산방과 농막지역의 고분과 신라시대 축성한 기성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산 좋고 물 좋고 비옥한 토지가 있어서 일찍부터 인류가 정착했다. 둔덕의 생활권은 통영이다.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뱃길로 이용해 왔다. 거제대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견내량에서 둔덕까지 비포장도로는 개설돼 있어도 정기